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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섭 Dec 14. 2019

추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주의) 책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책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폭력을 일삼던 동급생을 살해한 남자,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그리고 피해자의 엄마. 각자의 관점에서 세계를 기억하는 사람들. 스토리는 마치 원고가 뒤죽박죽 섞인 것 마냥 시공간을 넘나들며 두서없이 진행된다. 처음 읽었을 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내용을 이해하고 난 뒤 다시 읽으니 기묘하고 잔인하게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운명을 (남자는 결국 자신이 살해한 피해자 엄마에 의해 죽는다) 알고 있는 남자와, 다가올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의 말을 가볍게 여기고 흘려듣는 여자. 그리고 이 둘의 기억의 접점.


즐거웠던 한 때를 추억하는 것은 축복이다. 반대로, 불행했던 과거를 망각하는 것 역시 축복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다양한 경험이 쌓이고 현재의 것들이 축적되면서 과거는 퇴적되기 마련이다. 그러다 가끔씩 과거를 환기하는 매개체가 있는데, 이것은 고소한 마들렌 냄새일 수도, 즐겨 듣던 노래나 자주 거닐던 거리일 수도 있다. 나에게도 잊고 잇던 기억을 불쑥 떠오르게 하는 매개체가 있는데,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경우도 있고 언짢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한 개인의 삶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에 관한 무수한 기억은 단지 의미 없는 통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과 연관된 기억은 너무도 뚜렷하여 도저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다. 그것이 유쾌한 것이든, 불쾌한 것이든. 이와 같은 종류의 기억은, 기억의 주인공인 상대와 본인이 실제로 가까운 사이었는지, 함께한 시간이 많았는지 여부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누군가는 단 한 시간을 만나도 평생에 기억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반면, 또 다른 어떤 이는 일 년을 알고 지내도 뇌리에 남지 않는다. 뇌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추억과 망각은 만남과 이별의 역학관계와 관련이 깊다. 만났던 대상과 (만남의 대상은 비단 연인뿐 아니라 가족, 친구, 다른 인연, 반려 동물 등이 될 수 있다) 헤어진 뒤 그 사람과의 기억을 환기시키는 매개체를 보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이 든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함께 시간을 보냈던 장소나, 나만 알고 있는 그 사람의 특징, 좋아하고 싫어하는 음식 등을 우연히 접하면 과거의 기억은 순식간에 호출된다. 특히 이별의 시기가 최근일수록 이러한 증상은 더더욱 심한 경향이 있다.

 

그동안 몇 번의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면서 "좋은 기억만 남기고 나쁜 기억은 지울 수 없을까?"라는 공상을 한 적이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미셸 공드리가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 이러한 공상을 재현한 영화이다. 이별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기억을 삭제하지만, 결국 서로에게 다시 끌리는 연인들. 만약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이별한 연인과의 기억을 지우는 서비스가 존재한다면 누군가는 과연 기꺼이 이것을 이용할까? 곧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나는 이용할 것 같지 않다.


돌이켜보면 완전히 나쁜 기억도, 완전히 좋은 기억도 없다. 모든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토대가 되는 나름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때문에 나는 그 어떠한 과거의 기억도 지우고 싶지 않다. 아침이 오면 저녁이 오고 해가오면 달이 뜨듯이,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간다. 추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이따금씩 과거를 돌이키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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