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중섭 Jan 04. 2020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영화 <그녀 her>를 보고

**영화 <그녀 her> 스포일러 주의**


편지 대필 일을 하는 테오는 부인과 별거한 채 이혼을 진행 중이다. 테오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소개팅이나 온라인 데이팅 (나중에 기괴한 취향을 가진 여성과의 폰 섹스로 변한다)을 하지만 거기서 거기일 뿐 마땅한 상대를 찾지 못한다. 그러다 우연히 OS가 애인 역할을 해 준다는 광고를 보고 이를 구입한 테오. 호기심에 시작한 관계는 깊어지고 OS 사만다는 테오의 '그것'에서 '그녀'가 된다. 

이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나 SF 라기보다는 인간의 외로움과 관계에 관한 철학 영화에 가까워 보인다. 감독은 테오의 집에 1인용 가구들을 배치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인연들을 부각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쓸쓸함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다음 테오의 대사에서 그가 얼마나 관계에 지치고 외로움이라는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 지를 엿볼 수 있다. "가끔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이미 다 느낀 것 같아. 그런 새로운 느낌 없이 덤덤하게 사는 거지. 그냥 이미 다 느껴봐서 그런지 시큰둥 해."


나는 언젠가 사람과 로봇 간의 교감이 가능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척 관심 있는 주제이기 때문에 예전에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다. 인간이 로봇을 사랑하는 시대, AI스피커를 통해 바라본 섹스 로봇의 미래 자동화, 일자리 붕괴, 디지털 기술, 초연결 사회는 전례 없는 새로운 양식의 사랑을 낳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치 근대 유럽에서 태동한 로맨스가 오늘날 사랑의 보편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것처럼, 언젠가 미래에는 인간과 로봇 간의 사랑이 일반적인 현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로봇과의 사랑을 과연 '진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는, 사랑은 긍정성과 부정성이 공존하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다. 알베르 카뮈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라고 말했듯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심지어 그 대상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감정은 이토록 양가적인 것이다.


그러나 로봇과의 사랑은 부정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도의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로봇은 연인 (주인 혹은 고객이라는 표현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의 빅데이터에 기반한 최적의 맞춤형 애인 서비스를 제공한다. 인간의 지시에 순종적이고, 관계에 있어 그 어떠한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로봇의 특성은 마치 인간으로부터 무한한 애정을 받고 꼬리를 흔드는 애완견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것은 사랑의 부정성이 결여된 지극히 일방적인 관계일 뿐이다.


영화에서도 테오와 궁극적인 교감을 하는 것은 결국 OS 사만다가 아닌 그의 인간 친구 에이미이다. 사만다에게 다른 애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받은 테오. 일부일처제에 익숙한 테오와는 달리 사만다는 능숙하게 테오 외에도 수 천명의 고객들에게 애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에이미와 테오가 옥상에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에이미가 테오의 어깨에 살며시 기대는 것을 보면, 아마도 둘은 앞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이따금씩 상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날도 있겠지만.


영화를 다 본 후,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라는 시가 떠올랐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의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

독서할 시간이 없는 분들을 위해 책을 리뷰하는 '21세기 살롱'이라는 온라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3분만 투자하면 책 한 권의 개괄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독은 큰 힘이 됩니다.  

유튜브페이스북인스타그램


https://www.youtube.com/watch?v=wyhK5NOtuXs&t=7s








매거진의 이전글 추억과 망각의 경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