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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만 하면 ~ 할 수 있어"라는 달콤한 거짓말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나는 어릴 때 굉장한 게임광이었다. 컴퓨터 및 비디오 게임으로 RPG, 전략, 스포츠 장르 등 온갖 게임이란 게임은 다 섭렵했었고 공부와는 자연스레 거리가 멀었다. 게임중독에 걸려 두꺼운 안경알을 쓰고 매일 게임만 해대는 초등학생 아들이 한심해 보였는지, 어느 날 부모님은 이런 제안을 하셨다.


"네가 조만간 있을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상위권 안에 들면 최신 컴퓨터를 사줄게"


최신 컴퓨터라니! 초고속 컴퓨터를 가진다는 것은 더 이상 버벅거림 없이 최신 그래픽 고사양 게임을 원활히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3살 남짓한 꼬마였던 내게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던 것 같다. 태어나서 게임 말고 무언가에 열중해본 것이. 나는 컴퓨터를 사준다는 말에 엄청나게 고무되어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고, 다행히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던 모양인지 중학교 입학시험에서 꽤나 좋은 성적을 받아 반 1등으로 입학하게 됐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나를 총애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후 나의 성적은 금세 고꾸라졌고 그분을 실망시키는 일이 잦아졌다. 왜냐하면 부모님은 약속한 대로 최신 컴퓨터를 사주셨고, 목표를 달성한 내게 더 이상 공부를 할 유인이 없었기에.


이후 삶을 돌이켜보니, 내게 동기를 불어넣기 위해 어른들이 했던 말은 대부분 "지금은 힘들지만 이것만 하면 ~ 할 수 있어"라는 식이었고 실제로 고진감래 (苦尽甘来,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사자성어가 있을 정도로 저러한 인식은 우리에게 보편화돼있다. 흔한 예가 "남들 놀거나 잘 때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면 멋진 이성친구를 만날 수 있어", "네가 열심히 해서 취업하면 (시험을 붙거나) 보상받을 거야", "지금은 일도 많고 막내지만 꾸준히 다니다 보면 승진도 하고 연봉도 올라서 너도 현재보다 훨씬 잘 살 수 있어" 등이다.

라이프.jpg 힘들게 가다보면 저 너머 오아시스를 찾을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나태해지려 할 때마다 저런 말들을 되새기며, 현재 쉬면서 얻을 수 있는 행복 100을 희생해서 무언가에 집중하면 나중에 200, 300 그 이상의 것으로 돌아오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살았다. 마치 힘겹게 이 사막을 건너면 저 멀리 달콤한 오아시스가 있어서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것만 하면~ 할 수 있다"는 어른들이 들려주는 달콤한 약속은 어째 실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하니 그들은 중학생 때가 가장 중요할 때라며 당장 지금부터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 시기를 넘기면 보상이 있을 거라고 약속하며. 3년간의 중학교 공부를 무사히 끝났음에도 그들은 대학 입시가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며 고등학생 때 보내는 3년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고 가장 중요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그렇게 힘겹게 입시를 치르며 대학에 입학하고 정신 차려보니 군대를 가야 했다. 군대에 다녀오니 남들이 다 취업을 준비한다는데, 졸업 후 당당히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면 지난 10년 넘게 공부한 시간을 모두 보상받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직장인이 됐다. 얼마 전 보스가 내게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더해서 다른 쪽 일도 해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을 했다. 네가 지금은 A라는 일을 하고 있지만, B까지 하게 되면 네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거고 솔직히 네가 나중에 이직할 때도 몸값을 올려서 이직할 수 있지 않겠냐 등등 불라 불라 불라. 왜 그런 거 있잖나 시니어 매니저들이 하는 뻔한 소리. 가끔 바쁠 때 야근하긴 하지만 정시에 출퇴근하는 지금의 내 워크 & 라이프에 만족하는 편인데, B를 추가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이런 라이프를 포기하고 일에만 매달리는 생활을 지속해야 할 것 같아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마도 과거의 나였다면 No라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저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워커홀릭처럼 일에 매달렸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미 입사 후 2년간 주 100시간씩 밤낮 주말 없이 일하고 보니 일에 질린 것도 있지만, 지나고 나니 그렇게 젊은 시절 일했던 게 참 부질없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그래도 기어코 강권을 하길래, 아래의 시처럼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해버렸다. 나는 못해요.


<용기> - 이규경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부모님이 컴퓨터를 사주신다는 말에 혹해 처음으로 공부를 한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현재 30대가 됐다. 어느덧 내가 어릴 적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나이가 됐지만, 나는 이제 내가 어릴 때 믿었던 어른들의 달콤한 약속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이것만~하면 할 수 있다"라는 어른들의 말은 대개 거짓말이었다.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30년 이상 살아보니 A를 하면 B가 있고 B를 하면 C가 있더라. 어떤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을 즐기는 것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겠지만, 이 목표를 성취하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대단한 보상이라도 기다릴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만 하면, 이것만 끝내면 하면서 현재의 행복을 미루고 목표의 성취에만 매달리다 보면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의 행복을 미루지 말자.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기에도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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