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중섭 Aug 05. 2017

위대한 개츠비와 속물근성

애정의 결핍과 자존감 결여

소설 <위대한 개츠비> 속 개츠비는 열렬한 사랑꾼이자 야심가로 묘사된다. 밀수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은 개츠비는 옛 연인 데이지를 흠모하며, 그녀가 사는 곳 맞은편에 거처를 구한다. 그는 밤마다 그녀의 집 근처에서 반짝이는 그린라이트를 바라보며, 데이지와의 재회를 꿈꾼다. 데이지는 이미 거부 톰과 결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한 개츠비의 구애는 멈추지 않는다. 결국 데이지는 맘을 열고 개츠비는 그녀와 함께 도망칠 것을 꿈꾸지만, 소설은 결국 데이지의 배신과 개츠비의 죽음으로 비극적으로 끝난다. 무엇이 개츠비를 순박했던 군인에서 야심찬 사업가로 만들었을까? 그는 과연 진정으로 데이지를 사랑했을까? 


위대한 개츠비가 여전히 위대한 콘텐츠로 사랑받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남녀 치정극을 넘어 인간의 보편적 속성인 속물근성을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이후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미국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낸다. 위대한 개츠비 속 주요 인물인 데이지나 톰을 비롯해 개츠비의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개 허세와 허영 가득한 속물이다. 특히나 개츠비가 황금빛 여자로 묘사한 데이지는, 백치미 넘치고 돈과 안락한 삶을 좇는 전형적인 당시 상류층 부인을 대변한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다른 인물처럼, 개츠비도 이런 속물근성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가난한 군인이었지만, 밀수업을 통해 떼돈을 번 후 의기양양하게 데이지를 되찾으려 한다. 그는 정기적으로 파티를 열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며,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을 나왔다는 둥 출신을 부풀려 말한다. 개츠비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지독한 콤플렉스가 있는데, 영화를 보면 데이지의 남편 톰이 그의 출신에 대해 빈정거리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나온다. 이 대목을 보고 나는 과연 개츠비가 데이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데,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는 단지 신분상승이라는 목적을 위한 상징적인 수단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막대한 부를 쌓은 개츠비가 자신이 꿈꿔온 진정한 상류계층으로 도달하기 위한 마지막 퍼즐. 


속물을 뜻하는 영어단어 Snob의 어원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귀족 자제들이 다니던 학교를 부르주아 자제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파생됐다. 당시 귀족 자제들은 Noble을 줄여 'Nob'으로, 부르주아 계층의 자제들은 'Sine nob' (귀족성이 없다는 뜻의 라틴어)로 불렸다. 부의 축적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경험한 부르주아 계층은, 귀족 자제들의 문화를 흠모하고 모방하며 자신들을 그들과 동일시하려고 했다. 한편 부르주아들은 다른 평범한 사람들의 취향을 열등한 것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자신들을 평범한 사람들과 구분 지으며 우월성을 뽐내려 했다.


사람은 왜 속물근성이 있는 걸까? 왜 콤플렉스를 가지고 "급"을 나누며, 우월성을 뽐내려고 하는 걸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애정결핍과 자존감의 결여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 부모에게 받던 무조건적인 애정의 수준을,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남들에게 받기 위해서는 허울 좋은 껍데기가 필요하다.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한 조건은 보통 부, 권력, 명예, 외모 등이며, 보통의 사람들은 이러한 성취를 통해 남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성공에 목맨다. 특히나 일반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사회적인 성공에 부단히 집착하는 것은, 그들이 성공하지 못했을 때 여자에게 거절당할 확률이 크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인 여자가 사회적으로 실패했을 때 남자에게 거절당할 확률보다!) '남자는 능력 여자는 외모'라는 명제를 대외적으로 지지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이것이 괜히 나온 말은 아니다. 실제로 능력 있는 남자와 외모가 출중한 여자가 수월하게 짝을 찾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격한다.


만약 현재 자신이 느끼는 실제 지위와 추구하는 사회적 지위에 심각한 괴리가 있다면,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행태를 보인다. 알량한 콤플렉스를 감추려 개츠비처럼 허풍을 떤다든지, 과소비를 통해 고가의 재화를 사서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것. 100년 전 피츠제럴드가 묘사한 위대한 개츠비 속 뉴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통의 사람이 보통의 사회화를 하는 과정에서, 속물을 만나지 않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껍데기를 줄줄 읊는 사람들이나 소비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나면 때때로 구역질이 나는 것을 우리는 참아야 한다. 특히나 SNS는 유저들이 행복한 순간만을 올리는 것을 부추김으로써, 이런 속물근성의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속물근성이 보편화되며,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속물이 될 위험에 노출돼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속물이 되는 관성에 저항하기 참 쉽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는데, 나는 튼튼한 자존감이 그나마 방패막이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나다운 정체성을 유지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속물화에 반하는 힘이다. 실제로 이렇게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에 상관없이, 타인에게 사랑받을 확률도 높다. 평소에 일정 부분 속물처럼 살지라도 가끔씩 자신을 돌아보며 반성하고 자존감을 지키는 것, 그 정도만 해도 속물화에 저항하는 훌륭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https://www.youtube.com/watch?v=vdj6vEa5RjM&t=48s

  


 









  






  









 









 









매거진의 이전글 호밀밭의 파수꾼, 박하사탕 그리고 꼰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