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가 숙성되듯, 변증법을 통해 성장하는 정신
어렸을 때 맨 처음 '치즈'라는 이름으로 접했던 건 네모난 모양의 어린이용 슬라이스 치즈였다. 뚝뚝 끊어지는 질감에, 맛도 당최 무슨 맛인지 모르겠고 이걸 왜 먹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갔었다. 치즈가 먹기 싫었던 어린 나는 그래서 남은 치즈를 애꿎은 장난감 인형의 입에 넣어주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다르다. 오히려 없어서 못 먹는 지경이다. 세상에 맛있는 치즈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최근 가장 많이 먹었던 치즈는 브리 치즈. 본격적으로 발효가 진행되어 쿰쿰한 풍미가 매력적인 소프트 치즈의 하나인 브리는, 까망베르보다 덜 짜고 좀 더 크리미한 맛이 있다. 새콤달콤한 사과와 브리의 조합은 특히 발군. 과일과 궁합이 좋은 만큼 달콤한 잼 하고도 잘 어울린다. 한창 브리에 빠져있을 때는 통밀빵을 구워 브리를 뚝 떼어 올리고 그 위에 달콤쌉싸름한 오렌지잼을 얹어 먹곤 했다.
같은 브리 치즈라도 제조사 별로 맛이 조금씩 다르다. 재료의 비율과 만드는 환경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방법으로 같은 환경에서 만들었다 하더라도 얼마나 숙성되었는지에 따라서 맛은 또 한 번 달라진다. 브리는 유통기한에 가까워질수록 냄새가 진해지고 린드(치즈의 껍데기 부분)를 가르면 나타나는 속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한 번에 여러 캔을 사다 놓고 시간에 따라 다양한 풍미의 브리를 맛볼 수 있는 건 모두 치즈가 일정한 과정을 따라 숙성해가는 덕분이다.
이런 걸 생각하다 보면 치즈를 먹는다는 게 조금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만들어진 후 계속 숙성의 과정 중에 있는 치즈를,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 내가 맛보는 것이니 말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치즈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면 이번엔 헤겔이 떠오른다. 경험하고 있는 삶, 그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치즈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헤겔은 이 방법으로 우리의 ‘확실한 앎’을 찾으려 한다.
지난 화에서 우리는 칸트의 인식론을 살펴봤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이성이라는 ‘틀’ 안에서 세상을 경험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 틀은 우리가 세상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보증이 된다. 그렇다면 그 틀을 분석해 우리의 객관적인 앎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경계를 짓자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었다.
헤겔은 이러한 칸트의 이론에 반기를 든다. 인간이 결코 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칸트가 시도하는 것처럼 이러한 틀 밖으로 나가—마치 신과 같은 위치에서—그 틀 자체를 분석하는 일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설령 이런 방법이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칸트처럼 이성이라는 틀만 따로 뚝 떼어놓고 분석하는 방법은 마치 "물속에 들어가지 않은 채 수영하려 드는 것"과 같다고 헤겔은 꼬집는다. 그 틀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려면 실제로 틀이 작동하고 있을 때를 들여다봐야지, 작동도 안 하는 상태의 틀 자체를 뜯어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의 인식 구조 안쪽에서, 우리가 실제로 세상을 경험하는 그 순간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인간 정신이 삶 속에서 어떻게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지를 알려면 말 그대로 그 지식이 얻어지는 순간을 살펴보면 된다는, 지극히 심플한 논리다. 때문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인간의 정신이 외부 대상을 마주하고, 그 결과로 한 단계씩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맨 처음 '의식'으로 태어나 최종진화형(?)인 '절대정신'이 되어 마침내 이 세상의 진리를 파악하게 될 때까지. 정신은 세계를 경험하며 성장을 거듭해나간다.
정신의 발전 양상에 대한 헤겔의 글을 읽다 보면 치즈가 숙성되어 가는 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내 앞에 어떠한 대상이 나타난다. 편의상 이때의 내 정신을 A라고, 내 앞에 놓인 대상을 A*라고 이름 붙이자. 모든 걸 다 완벽하게 아는 절대정신에 도달하기 전까지 나의 정신이 어떠한 대상을 오롯이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A*에 대한 나의 인식은 아무리 노력해도 A* 그 자체와 완전히 일치하지 못한다. 내게 포착되지 않고 남아있는 부분이 여전히 대상에 존재하는 탓에,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인식이 일치하지 않은 채 서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A*에 대한 '앎'을 얻지 못한다. 그래서 정신은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A도 A*도 아닌 B라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정신으로 변모하는 길을 택한다. 자신에게 파악되지 않고 남아있는 영역을 아예 새로운 차원으로 환원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둘 사이의 불일치를 해소하고자 그 둘을 모두 통합하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 한 차원 높아진 정신은 자신이 성장한 만큼 인식하고자 하는 대상도 보다 높은 단계의 것을 찾게 된다. 이제 정신의 관심은 A*가 아니라 B*라는 대상으로 옮겨가게 된다.
치즈의 숙성 과정도 변증법적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유산균과 곰팡이의 활동으로 우유의 단백질이 분해되지만, 이러한 대립으로 인해 썩는 대신 '발효'라는 제3의 길로 나아간다. 만들어진 직후의 프레쉬 치즈에서부터 소프트 치즈, 세미하드, 그리고 가장 숙성이 많이 진행된 하드 치즈까지. 단계별로 치즈의 모습과 맛이 다르고 그 치즈와 함께 먹으면 잘 어울리는 음식—관심 대상—도 달라진다.
숙성 과정을 거치지 않아 향이 약하고 보드라운 프레쉬 치즈. 뽀오얀 생모짜렐라를 토마토, 블랙올리브와 함께 먹는 것은 클래식 중에 클래식이다. 치즈 특유의 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올리브오일의 섬세한 향과 맛이 잘 느껴져 프레쉬 치즈를 먹을 때는 최대한 질 좋은 올리브오일을 쓴다.
천도복숭아와 함께 샐러드로 먹으면 복숭아의 단맛과 생모짜렐라의 부드럽고 짭짤한 맛이 어우러져 별미다. 이때도 올리브오일은 잊지 말 것.
앞서 등장했던 브리가 속하는 소프트 치즈는 본격적으로 발효의 풍미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단계다. 탄수화물과의 케미가 비약적으로 좋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이보다 숙성이 더 진행되면 쫀쫀한 질감의 세미하드 치즈가 되는데, 여기 속하는 고다, 에담, 에멘탈 등은 아마 샌드위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익숙한 이름일 것이다. 수분이 빠지며 짠맛이 강해지기에 나는 주로 맛이 진한 호밀빵 위에 올려 먹곤 한다.
우리가 흔히 '파마산 치즈'라고 말하며 피자나 파스타 등에 뿌려먹는 가루는 사실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라는 고급 하드 치즈를 모사해서 만든 가공 치즈다. 진짜 하드 치즈는 숙성 기간이 긴 만큼 단단하고 발효 풍미 또한 더욱 응축되어 있으며 그만큼 가격대도 높다. 나는 리가토니 면과 베샤멜소스로 파스타를 만들고 저렴이 버전의 '파마산 가루'를 뿌렸는데 보급형이라 그런지 사진으로도 티가 안 난다(...)
다시 헤겔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면, 정신은 위와 같은 변증법적 운동을 계속해나가며 세계를 알아가다가 마지막으로 '절대정신'이 되어 세계의 진리를 오롯이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정신의 연대기(?)를 다루는 탓에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다 보면 꼭 성장 영화를 위한 시나리오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약간 소설 같기도 하고, 문장의 어투도 굉장히 극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칸트와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른 만큼 글을 쓰는 스타일도 다른 것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논리 정연한 칸트의 텍스트를 더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이론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직관적으로 공감하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처음엔 그 독특함에 멈칫하더라도, 한 번 접해보면 그 매력에 빠져 계속 먹게 되는 치즈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