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수민 Mar 07. 2019

겨울엔 따끈따끈한 칸트

우리의 인식능력이 붕어빵 틀이라면

날이 금세 따뜻해졌다. 벌써 겨울이 가고 있다니. 따뜻한 날씨는 반갑지만 추울 때만 만날 수 있는 길거리 간식들의 계절을 보내기는 못내 아쉽다. 그중에서도 붕어빵은 '붕세권'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자랑한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속에 퍼지는 따뜻하고 달콤한 붕어빵 냄새. 붕어 모양 틀 안에 반죽을 붓고, 까만 팥소를 넣은 다음 재빠르게 반죽틀을 차례차례 여닫는 손놀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광경이다.


Ⓒ조찬현 님 (bit.ly/xlvjj)


난 사실 호두과자도 좋아한다. 요새는 전문판매점도 많고, 택배 배송으로 사계절 내내 받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갓 나온 호두과자를 한 알 씩 꺼내 먹으며 걸어가는 재미는 역시 겨울에만 가능하다. 더구나 호두과자는 이름에 걸맞게 진짜 호두까지 박혀있다. 동글동글한 호두알 모양의 과자를 가르면 나타나는 팥소와 호두 한 알. 모양도 발상도 너무나 귀엽다.


Ⓒ박선영 님 (bit.ly/2C5kcup)


찬바람을 피해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면 델리만쥬가 눈에 띈다. 맡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치유되는 것 같은 그 냄새에 홀려 한 봉지를 사들면 옥수수 모양을 한 만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냄새가 더 맛있는 듯한, 저렴한 맛의 슈크림 카스테라지만 B급의 맛이 묘하게 지하철역과 잘 어울린다.


Ⓒ델리스


붕어빵, 호두과자, 델리만쥬.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에 넣어 구워낸다는 것. 덕분에 모양은 똑같지만 속재료를 바꿔 다양한 버전이 나오기도 한다. 클래식 중에 클래식인 단팥 붕어빵. 옆에 있으면 꼭 한 두 개씩 곁들여 사고 마는 슈크림 붕어빵. 얼마 전엔 고구마 앙금이 들어간 붕어빵이 화제가 된 적도 있었고, (맛은 좀처럼 상상이 되지 않지만) 안에 피자 치즈를 넣은 붕어빵까지 등장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델리만쥬 반죽에 호두과자 앙금이라 해도, 붕어빵 틀에 넣고 구워낸다면 붕어 모양으로 찍혀 나올 것이다. 어떤 재료든 틀 안에 들어가면 그 틀이 생긴 모양대로 찍혀 나올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끈따끈하고 달콤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칸트 이야기를 한다고 놀라지 마시라. 칸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소재가 바로 이 '틀'이니까 말이다. 수업에서 맨 처음 이 비유를 접하고, 제목부터 거리감이 느껴졌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생각보다 딴 세상 이야기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니 칸트를 읽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다면 먼저 간식을 준비하자. 에 넣고 구워내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다 좋다. 나는 (예상했을지도 모르지만) 호두과자로 정했다.


Ⓒ오수민



칸트, 형이상학의 아이돌


철학의 중요한 물음들 중에는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있다. 이 주제를 탐구할 때 객관성이란 키워드는 매우 중요하다. 이 세상에 대한 확실한 앎이라면 단순히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앎’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크,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우리의 감각을 통한 경험이 객관적인 지식을 제공해준다고 믿었다. 반면 데카르트나 스피노자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감각적 경험이 아닌 인간에게 내재된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것들만이 객관성을 보장받는다고 보았다. 이들은 감각 경험이 주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 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래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싸워 봐도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칸트가 등장했다. 자신이 형이상학에서의 싸움을 끝내겠다고 말하면서. 그는 경험과 이성, 둘 중 하나만을 택하지 않고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답을 내놓았다.


칸트가 모델로 삼은 것은 수학이었다. 수학적 증명을 통해 얻어진 결론은 확실한 참, 즉 객관적인 참이다. 누가 보면 참인 것을 다른 사람이 보면 거짓이 되거나 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은 '진리', 다시 말해 확실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칸트에 따르면 단순히 삼각형이라는 외부 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다. 즉 우리가 백지상태에서 외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로 무언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이성"은 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스스로의 원리가 있고, 그 에 맞춰 외부 세계를 경험한 결과가 우리의 지식이 된다고 칸트는 설명한다.


이성이 선천적인 틀에 맞춰서 외부 세계를 받아들인다니 이게 무슨 소린가 싶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수학의 도형을 포함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외부 세계는 '공간을 가지는 어떠한 것'으로 우리에게 경험된다. 너무 당연하지만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면 꽤 신기한 일이다. 이건 이미 인간의 이성에 '공간'이라는 선천적 개념이 있어서, 외부 세계는 언제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으로—이성이라는 틀의 모양대로—내게 경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붕어빵 기계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든 붕어 모양으로 구워질 수밖에 없듯이, 우리가 인식하는 외부 대상도 우리의 이성이라는 틀이 생긴 모양대로 경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붕어빵 틀 안에 들어온 반죽은 그 틀의 모양대로 찍혀 나온다. Ⓒ이용재 님 (bluexmas.com/5331)


그리고 이러한 이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가지고 태어나는 탓에, 이성이라는 틀을 통해 경험한 바는 인간 보편에 대해 객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모두가 동일한 틀을 통해 세상을 경험한다면 그 경험에 대해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칸트는 말한다. 이성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얻은 지식은—적어도 인간들 사이에서는—확실하고 객관적인 앎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이성의 틀을 통한 경험이 우리의 확실한 지식을 보장해준다면, 그 틀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를 알아냄으로써 우리에게 확실한 지식이 가능한 범위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까지의 형이상학에서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못했던 건 애초에 이러한 범위 바깥을 알고자 했기 때문이라며 칸트는 지적한다. 


그리하여 칸트의 최종 목표는 다음과 같이 설정됐다. 인간의 선천적인 이성 구조를 분석하여 그 능력이 미치는 범위를 알아내고, 그에 따라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과 인식할 수 없는 영역 사이의 경계를 짓는 것. 그의 책 이름이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인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독일어 'Kritik'에는 '분석'이라는 뜻이 있어서, 제목을 풀어보면 이성 그 자체die reine Vernunft를 분석Kritik한다는 의미가 된다.




칸트를 읽는 겨울


사실 나는 직접 공부해보기 전까지 칸트를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만 했었다. 주워들은 이미지에 지레 겁을 먹은 탓이다. 그런데 막상 접해본 칸트 철학은 분명 어렵긴 하지만 너무나도 재미있는 것이 아닌가! 낯선 개념과 어려운 단어가 많이 쓰여서 한 번에 이해하기는 힘들어도 찬찬히 읽다 보면 명석하고 논리적인 그의 주장에 읽는 내가 다 쾌감이 느껴졌더랬다. 칸트가 왜 이토록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는지 저절로 납득도 되고.


Ⓒ오수민


그러니 나처럼 칸트를 피하고만 있었다면 속는 셈 치고 하루라도 빨리 그의 철학을 만나보기를 추천한다. 따끈따끈한 간식과 더불어 머리에서 슬며시 열이 나게 해 줄 칸트의 책을 펼친다면 아마 전기장판 없이도 꽤 훈훈한 겨울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재미있지만 어렵지 않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이미지 출처는 사진에 링크와 함께 표기. 커버이미지는 이용재 님의 사진을 사용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