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수민 Mar 28. 2019

다이어트는 에피쿠로스처럼

미식가? 알고 보면 본투비 다이어터

아침과 점심을 모두 건강하게 먹었더니 저녁이 되자 뭔가 달달한 게 당긴다. 책상 서랍에 저장해둔 마쉬멜로우 봉지를 꺼낼까 말까 고민이 된다. 딱 세 개만 먹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이미 손은 서랍을 열고 있다.


달콤하고 폭신말랑한 마쉬멜로우의 맛에 황홀함을 느끼며 세 개를 다 먹고 나니 다시금 고민이 찾아온다. 그만 먹을까? 아니면 조금만 더 먹을까..?


이미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틀린 거였다. 하나만 더 집어 먹자는 생각은 ‘몇 개만 더‘로 이어지고, 그다음부턴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이다. 한 순간의 기쁨과, 밀려오는 후회와, 빠지지 않는 마법의 문장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네온비와 캐러멜 작가의 웹툰 '다이어터'



이 쾌락은 그 쾌락이 아니다


혹시 '에피큐어epicure'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에피큐리어스Epicurious'라는 웹사이트는? 에피큐어는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고, 에피큐리어스는 해외의 유명한 요리 사이트이다. '에피큐리언epicurean'은 '에피쿠로스 학파'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미식가를 뜻하는 '고메gourmet'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단어를 보자마자 짐작할 수 있듯, 이들은 에피쿠로스Epicurus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대체 에피쿠로스는 얼마나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길래 미식에 관련된 단어란 단어에는 죄다 이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까?


‘Epicurious’ 사이트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실제 에피쿠로스는 미식과는 거리가 한참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의 식생활은 수행승의 식생활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그가 '쾌락주의자'였다는 것은 사실이고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실제로 '쾌락주의'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가 추구한 쾌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초적인 쾌락과는 전혀 달랐다.




에피쿠로스의 '쾌락'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목표는 "최대한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복은 곧 쾌락을 얻는 것을 의미했다. 에피쿠로스는 모든 쾌락은 ‘좋다’고 말한다. 쾌락과 함께 수반되는 행위가 나쁠 수는 있겠지만, 쾌락 그 자체는 무조건 좋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쾌락이며, 삶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 또한 쾌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성적으로 이렇게 느낀다고 말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한 논증조차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이를 언뜻 보면 쾌락이 삶의 전부라며 쾌락지상주의를 설파하는듯하지만 막상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상은 오히려 절제주의에 가깝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욕구의 만족'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갖는 욕구 중 가장 본성적이면서도 강력한 욕구는 ‘고통을 제거하려는 욕구’라고 말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고통이 없는 상태’는 그 자체로 이미 쾌락이라는 말과 같다. 배고픔, 목마름, 추위 등의 고통스러운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얻어지는 이러한 종류의 쾌락은 고통의 해소가 다 끝난 후 찾아온다는 의미에서 '정적인 쾌락'으로도 불린다.


반면, 본성적이지 않은—고통을 없애려는 목적이 아닌—욕구를 채우는 데에서 오는 쾌락, 이를 테면 이미 배불리 식사를 한 상태에서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싶다는 욕구를 만족시킴으로써 얻는 쾌락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안만 느껴지는 쾌락이라고 하여 ‘동적인 쾌락’으로 분류된다.


동적인 쾌락을 산출하는 욕구는 우리에게 필수적인 욕구는 아니다. 디저트를 먹어도 안 먹어도, 결국 배가 부른 건 똑같다. 반면 정적인 쾌락을 산출하는 욕구는 우리에게 필수적이며, 따라서 얻어지는 쾌락의 크기도 훨씬 크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우리가 추구하고 가치를 둬야 할 쾌락은 바로 정적인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배고픔을 반찬으로 해서 먹는 소박한 한 끼가 배부른 상태로 먹는 진수성찬보다 우리에게 더 좋은 그리고 더 많은 쾌락을 준다고 본 것이다. 이 얼마나 세상 모든 다이어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상인가!




정적인 쾌락을 주는 한 끼


나는 원래 한 끼를 먹으면서 그다음 끼니를 생각하고, 일어나면 뭘 먹을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잠이 드는 그런 사람이다. 어쩌다가 맛없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게 되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음식을 그저 "허기를 달래주면 그만"이라는 정도로 생각하는 때가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온다.


Ⓒ오수민


그런 날은 이런 걸 해 먹는다. 두부와 오이를 메인으로 한 샐러드. 팬에다 올리브오일을 넉넉하게 뿌리고 두부를 튀기듯 익혀낸다. 맛이 강하지 않은 잎채소를 찢어 넣고 오이도 함께 썰어 넣는다. 드레싱은 생략. 그저 소금만 사용해서 간을 맞춘다. 화려한 맛이 나진 않지만 배고픔을 가시게 해 준다는 단순하고 소박한 목적에 충분히 부합하는 한 접시다.


Ⓒ오수민


아니면 채소만을 사용해 파스타를 만들기도 한다. 파스타는 통밀 파스타를 사용했다. 일반 밀로 만든 파스타보다 훨씬 뻣뻣하지만 향이 굉장히 구수해서 한 번 맛본 후로는 좀처럼 일반 밀 파스타에 손이 가지 않는다. 다만 삶을 때 일반 파스타보다 시간을 조금 더 들여야 한다.


필러를 사용해 애호박을 얇은 끈 모양으로 벗겨내고, 애호박의 순한 맛에 어울리도록 베이비채소를 준비한다. 드레싱은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식초. 올리브오일도 최대한 향이 부드러운 것으로, 발사믹 식초의 두 배 가량 넣어준다. 익히지 않은 애호박의 싱싱하고 달콤한 맛과 담백하고 구수한 통밀 파스타, 그리고 그 사이를 상큼하게 균형 잡아주는 드레싱 덕에 물리지 않고 끝도 없이 먹게 된다.




다이어트는 쾌락주의와 함께


매일 이렇게 ‘쾌락주의적’인 식단을 이어갈 수 있다면 다이어트는 순조롭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나태해지는 마음을 다잡아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어떤 쾌락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통을 일으킨다면 그 쾌락은 추구하지 않는 것이 좋으며, 지금은 고통일지라도 나중에 더 큰 쾌락을 산출한다면 그 고통은 감내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어떤가. 마치 "지금 먹어서 잠깐 즐겁고 나중에 후회하느니, 차라리 지금 잠깐 배고픔을 참고 나중에 기뻐하는 게 낫다"로 들리지 않는가?


‘쾌락’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절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에피쿠로스. 다이어트를 계획하고 있다면 날이 더워지기 전에 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전 04화 이성(理性)을 위한 초콜릿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