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가 '부침개'는 아니잖아요
초등학교 때였나, 교과서에서 여러 나라의 문화가 소개되는 자리에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예가 있었다. 바로 “피자는 이탈리아식 부침개”라는 비유. 나는 이 비유가 정말 너~무너무 싫었다. (어쩌면 “이탈리아식 빈대떡”이었을지도. 이건 더 싫어!!!) 둥그런 모양 빼고는 재료도, 만드는 방법도 닮은 점이라곤 전혀 없는 두 음식을 마치 서로 대체할 수 있는 음식인 것 마냥 엮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개념적으로 거부반응이 든 것이다.
그런데 철학에서도 피자를 “이탈리아식 부침개”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철학'이라는 이름 자체와 관련해서 말이다.
철학의 세부분야를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지역’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으로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분류다.
고대 그리스에 전통을 둔, 논리학, 인식론, 윤리학 등으로 대표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르는 건 별 문제가 없다. 피자를 '피자'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공자에 뿌리를 둔 동양의 학문을 ‘동양 철학’이라고 부르는 건, 엄밀히 말해 딱 맞는 표현이 아니다. 마치 피자를 '부침개'라고 부르는 격이랄까. 대체 ‘철학’이라는 이름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 이를 알기 위해선 몇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동양의 학문이라 하면 모름지기 ‘유학儒學’이다. 이것이 송명시대에 ‘성리학性理學’으로 발전했는데 그 뼈대를 세우는 데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주자, 즉 주희朱熹인 까닭에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주자학이 동양의 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시기, 서양에서 새로운 학문이 들어왔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전파한 서양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가 바로 그것이었다. 바다 건너온 신문물이라니, 일단 이름은 원어 그대로 ‘페이루쑤페이야費祿蘇非亞’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만 따서 부르다 보니 이름만 들어서는 당최 뭘 하는 학문인지 한방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결국 이미 동양에 있던 학문 중 필로소피아와 가장 비슷해 보이는 학문을 골라 그 이름을 쓰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격물궁리格物窮理'의 학, 즉 격물궁리지학이다.
격물궁리는 주희가 외부 세계를 탐구할 방법으로 내세운 이론으로, 그에 따르면 외부 사물의 원리인 ‘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나의 마음을 살펴보아야 한다. ‘리’는 나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물궁리학은 외부 세계가 아닌 마음에 집중하며, 마음속 ‘리’를 깨닫는 방법으로 경전을 공부할 것이 중요시된다.
격물궁리지학과 필로소피아 모두 궁극적으로는 이 세계를 알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외에는 오히려 서로 다른 점이 더 많다. 단적인 예로 서양의 필로소피아가 전통적으로 신의 존재에 대해 탐구해왔던 것과는 달리, 동양의 유학은 현세를 잘 사는 방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필로소피아는 '격물궁리지학'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게 되었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며 변화가 일어났다. 서양의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필로소피아로부터 '사이언스science'가 따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의 니시 아마네가 '철학哲學' 그리고 '과학科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필로소피아를 '철학'으로, 사이언스를 '과학'으로 번역할 것을 제안했다. (초기에는 '분명하게 밝힘을 바란다'는 뜻의 '희철학希哲學'이었으나 이후에 '희'자가 빠졌다) 이러한 신조어는 당시 동양에서도 객관적 지식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의 인기가 높아지던 경향과, 일본이 동양에서 학문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과 맞물려 금세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신조어들은 그것이 누군가가 번역어로서 발명해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커졌다. 그리고 서양의 학문이 주류가 되면서 기존의 동양의 학문은 서양의 학문 체계로 편입되어 버렸다. 이제 격물궁리지학은 동양 ‘철학’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동양의 학파가 ‘철학’으로 분류되고, 그 ‘철학’의 기준이 서양 철학으로 세팅되어 있는 상황에서 철학 공부를 하다 보면 오해를 하기 십상이다. 동양 철학이 학문적인 기준에 미달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에 “동양의 전통 학문이 서양의 학문보다 열등한 건가” 하는 고민으로 괴로워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는 두 학문이 애초에 대등하게 치환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피자를 '부침개'라고 부르면서 한국의 부침개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다. 왜 이 부침개는 반죽을 따로 빚냐고, 부추가 안 들어가지 않았냐고 따지며 피자를 열등한 부침개라고 평가한다면 우스운 일일 것이다. 서양 철학을 기준으로 동양 철학을 논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피자집에 가서 부침개를 찾을 수 없듯, 동양 철학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대답과 동양 철학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서양 철학을 대할 때와 달라야 한다. 부침개만이 줄 수 있는 맛이 있고, 피자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처럼, 그래야 각각의 학문이 가진 맛과 매력을 보다 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