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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Dec 17. 2020

싱글대디

아빠 홀로 딸을 잘 키운다는 거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온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전화벨이 열 번을 넘어 울리기에 조심스레 받았다. 내 이름을 확인하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파르르 떨려온다. 자기 목소리를 기억하겠느냐고 묻는데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30년 전, 전곡, 신우회…….”

 이름은 가르쳐주지 않고 무슨 스무고개 하듯 연상되는 단어만 나열한다. ‘오병장’이라는 단어에서 30년 전 그 사람을 떠 올릴 수 있었고 그 시절로 달려가 어렴풋한 추억을 더듬어 갔다.

  그를 알게 된 건 30년 전 고향교회에서다. 전곡은 군사지역이라 군부대가 많다. 길거리에서 탱크를 보는 건 시골에서 마을버스를 만나는  것 같이 뜸한 일이었지만 행군하는 군인들을 보는 건 오월에 장미를 보듯 흔한 일이었다. 토요일이면 초록 군복을 입은 군인들 십여 명과 청년들 대여섯 명이 시골교회 마룻바닥에 둘러앉아 찬양과 성경말씀을 나누고, 라면도 끓여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때 그는 병장이었고 군부대 대원들을 인솔해 오는 책임을 맡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가끔 우울해 보이기도 했지만 기타를 잡고 찬양을 인도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같았다. 아까시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5월이면 교회 마당에 둘러앉아 밤늦도록 아까시 향보다 더 진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나는 먼 곳에 직장을 갖게 되어 그 교회를 떠나야 했고 그즈음 병장도 제대를 하여 그곳을 떠났다. 그 후로 서로의 소식도 모른 채 30여 년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다. SNS를 통해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30년 전 추억의 친구들과 함께 그를 만났다. 머리는 희끗희끗하고 눈가에 맺힌 주름살이 세월을 감출 수 없었지만 20대 푸릇한 청년으로 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장은 그간의 굴곡진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군 시절 사랑하는 여인과 이별을 하고 생명을 놓아버릴 만큼 힘들었을 때 시골 그 교회는 안식처이자 위로의 장소였으며 마음껏 눈물을 흘릴 수 있는 통곡의 장소였다고 했다. 그때 함께 위로해 주고 웃어 주던 교회 청년부를 잊을 수 없어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먼 길을 돌아 이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소장까지 되었으나 이른 나이에 명퇴를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퇴직금과 저축해 두었던 돈을 모아 대학가 앞에서 식당을 운영하다가 2년 만에 집 한 칸 얻을 수 없을 정도로 기울고 말았다. 띠 동갑 어린 아내 사이에 딸을 하나 낳았지만 가난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내와 헤어지고 딸을 맡아 키우기로 했단다. 이때부터 가시고기 아빠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잠도 깨지 않은 세 살 된 딸을 놀이방에 맡겼다가 퇴근할 때 데려와야 했다.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딸을 억지로 떼어 놓고 회사로 달려간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종일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단다. 놀이방이 쉬는 날에는 직원들의 눈총을 감수하며 딸을 안고 출근을 했다. 먹성이 좋은 아이를 위해 이유식도 손수 만들어 먹이고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놀이 공원에 갔다. 도깨비 머리띠도 하고 솜사탕이나 풍선을 들고 하트를 날리며 찍은 사진도 수 백 장은 족히 넘을 거라고 했다.

  밤이면 잠투정하는 딸을 업고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며칠 안 나가면 얼굴 못 봐서 섭섭하다고 말하는 아주머니 팬들이 많았단다. 아기가 잠들기 전엔 동화책도 읽어주고 각종 인형으로 공주놀이도 해 주는 등 엄마의 몫까지 감당을 했다.

싱글대디(아기 키우는 아빠들) 모임에도 나가 애로사항을 공유하며 딸 키우는 일에 전념을 했다. 그는 세상 그 어떤 일이 딸 키우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었고 딸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회사에서 중요한 회식이 있던 날. 귀가가 늦을 것 같아서 누나에게 아기를 맡기고 모처럼 늦도록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 술이 만취가 되어 집에 돌아와서는 씻지도 못하고 쓰러져 잤단다. 아기가 갑자기 울고 토해서 그를 깨웠지만 그는 태풍에 쓰러진 고목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누나는 아기를 안고 택시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다녀왔는데도 모르고 잤다고 한다. 다행히 아기는 급체로 응급조치 후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건 이후 그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신이 건강하고 온전해야 딸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날 이후 아무리 중요한 회식 자리에서도 술을 마시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때의 결심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딸은 엄마가 없는 빈자리를 전혀 느끼지 않을 만큼 밝고 건강하게 잘 커주었다.

  올해 아이는 대학에 입학했고 장학금도 받아 아빠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주말이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도 벌어 쓰는 딸 덕분에 이제는 삶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며 아기같이 웃는다. 그 옛날 교회에서 기타를 치며 찬양하던 그 모습이었다.

  가시고기 수컷은 수초 우거진 곳에 둥지를 만들고 암컷을 불러들여 알을 낳게 한다. 산란을 마친 암컷은 둥지를 떠나고 수컷은 이때부터 불철주야 알을 지킨다. 알들을 노리는 적들을 막느라 수컷은 잠시도 쉬지 못한다. 10여 일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버티던 아빠 물고기는 새끼들이 부화해 5일쯤 되면 새끼들이 있는 둥지 앞으로 가서 숨을 거둔다. 사냥을 하지 못하는 어린 새끼들은 아빠를 먹고 먼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는다.

  

  그는 가시고기였다. 20년 동안 홀로 딸을 키우며 자신의 사생활은 없었다. 먹는 것, 보는 것이 다 딸에게 맞춰져 있었고, 생각하고 보는 것조차 딸의 시선에 맞춰야만 했다. 딸이 초등학교 때는 함께 초등학생이 되어야 했고, 중학교 때는 함께 사춘기를 앓았으며 고등학교 때는 입시지옥을 함께 걸어야 했다. 대부분의 부모가 자식에게 희생하듯 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장한 아버지상을 수여하겠다고 몇 번이나 권유를 했다고 한다. 딸이 그토록 건강하게 자란 것은 그의 온전한 희생을 먹은 덕이리라.

  그는 조금씩 자신에게 여유를 주고 있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분재에 마음을 쏟고, 전국의 소나무를 찾아 여행한다고 말하며 아까시꽃 같은 웃음을 날린다. 그는 이제 스스로에게 장한 아버지상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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