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11시 반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가고 있었다. 독일의 많은 한인교회들은 예배공간을 독일교회나 성당과 나눠 쓰기 때문에 오후에 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다.
비가 자주 내리는 독일의 거리는 칙칙하고 어둡다. 일요일에는 버스도 자주 오지 않아서 그런지 정류장마다 많은 사람들이 승차를 했다.
울긋불긋한 가발을 쓴 사람. 앙증맞은 삼각 모자를 쓴 사람. 하얀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버스에 뿐만 아니라 거리에도 쏟아져 나왔다. 10월 31일 할로윈데이에도 많은 사람들이 섬뜩한 분장을 하고 거리를 누비고 다녔는데 11월 11일은 도대체 무슨 날일까?
한국에서는 11월 11일이 빼빼로데이다. 10월부터 거리마다 빼빼로 상자를 쌓아놓고 연인들을 유혹한다. 빼빼로 박스를 여러 개 붙여 하트 모양으로 만들어 진열해 놓고 초콜릿 바구니를 만들어 비싼 값에 팔기도 한다.
어느 해인가 빼빼로에서 벌레가 나왔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난다. 쌓아두었던 물건들을 다음 해에도 되팔기 하다 보니 이런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한다. 설마 독일에서도 빼빼로데이를 기념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전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유럽에서 11월 11일은 영령 기념일 또는 종전 기념일(remembrance Day)로 제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들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 연방 국가들과 프랑스•벨기에를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에서 지켜지는 현충일과 같은 날이라고 한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을 회상하기 위해 11월 11일에 지켜진다.
독일은 이 날 카니발이 시작되는데 쾰른시에서 매년 11월 11일 11시를 기점으로 시작되어 다음 해 3월까지 긴 기간 동안 지키고 있다.
쾰른 카니발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닌 또 하나의 새로운 계절이라는 의미에서 일명 '제5의 계절'이라 불리는 독일의 축제이다.
구름이 끼고 비가 자주 내리는 칙칙한 날씨에 이런 카니발은 자칫 우울증에 빠지게 할 사람들의 마음에 활기와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리라.
11월 11일이 되면 기억나는 선생님이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난 오선생님은 우리 학교 미술 선생님이었다. 단아한 미소와 상큼한 목소리는 뭇 남학생들에게 첫사랑의 여인으로 가슴앓이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어느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비로운 존재로 여겨졌던 분이다.
그 분과 내가 친해지게 된 것은 미술실에 남아 뒷정리를 도와주면서 였다. 어느 수요일 오후. 선생님은 급하게 갈 곳이 있다며 미술실 열쇠를 나에게 맡겼다. 깨끗하게 정리해놓고 다음날 미술실에 갔더니 선생님은 예쁜 그림 붓을 선물로 주어셨다. 선생님의 스케치북을 보여주며 그림도 설명해 주셨다. 꽃을 든 남학생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수줍은 듯 꽃을 든 손이 그림 속에서도 떨리는 듯했다.
가톨릭 신자인 선생님은고등학교 때 수녀가 되기로 서원을 했다고 한다. 10년의 수련기를 거치고 나면 종신서원을 할 수 있다. 선생님은 매주 수요일마다 성당에 가서 수련을 하고 기도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수요일에도 성당에 가느라 내게 미술실 뒷 마무리를 부탁한 것이었다. 마음도 예쁜 선생님이 수녀가 된다면 마음 아파할 남학생들이 한 둘이 아닐 테지만 하얀 수녀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하며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 선생님과 더욱 친해졌고 선생님은 내게 좋은 말씀도 해 주시고 시화전에 낼 그림도 도와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2학년 때부터 미술 수업은 교과에서 사라지고 선생님과 함께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고3 즈음에 선생님도 다른 학교로 정근을 가시고 나도 졸업을 한 지 꽤 여러 해가 지났다.
'선생님은 지금쯤 수녀가 되셨을까.'
마음속에 그분 생각으로 아련할 즈음 우연히 선생님이 결혼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11월 11일 11시에.
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림 속 남학생의 모습과 함께 수녀복 대신 하얀 면사포를 쓴 선생님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다.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하교 시간이면 예쁜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여학교 정문에 남학생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그녀는 이미 테레사 수녀님을 본받기 위해 수녀가 되기로 서원을 했기에 아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기간 줄을 섰던 남학생들도 하나 둘 떨어져 나갔지만 딱 한 사람은 달랐다. 사랑하는 여학생이 수녀가 된다면 자신은 신부가 되겠다며 하루도 빠짐없이 교문 앞에서 꽃을 들고 서 있던 그림 속의 남학생이다.
성인이 되어 선생님이 된 여인을 향한 그의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수련을 위한 10년의 기간이 지나고 종신 서원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고민해 달라는 그의 말대로 선생님의 진지한 고민은 시작되었다.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명 장면들이 떠오른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수습 수녀 ‘마리아’는 원장 수녀의 권유로 해군 명문 집안 폰 트랩가의 가정교사가 된다. 마리아는 엄마 없이 군대식으로 길들여진 일곱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그들과 교감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대령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이들의 곁을 떠나 다시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고뇌하던 마리아는 결국 사랑을 선택하게 된다.
선생님을 11년간 짝사랑했던 남자. 하루도 빠짐없이 사랑을 고백했던 그 남자와 결국 11월 11일 11시에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수녀의 길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을 선택한 것이다. 결혼 후 아프리카 오지마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이들에게 결혼자금과 신혼여행 비용을 나누기 위함이라는데 선생님 소식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1월 11일 11시.
내 기억 속의 선생님은 오늘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주머니를 열고 있을 것이다. 오늘 예배시간에 사랑스러운 두 분의 행복을 위해 기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