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주방용 칼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그건 과일을 깎는 작은 칼이었다. 아들은 지난 1년 동안 그 작은 과도로 생활하면서 불편함 모르고 살았다며 새로 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단 며칠간이지만 아들을 도와주기로 온 이상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 칼을 사기로 마음먹고 아헨에 있는 마트를 찾아 나섰다.
제일 처음 간 곳은 집에서 가까운 '네토'라고 하는 마트다. 이곳엔 식료품이며 과일, 냄비나 학용품들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주방용 칼은 없다.
좀 더 내려가면 '테디'라고 하는 1유로 마켓이 있다. 우리나라의 1000냥 백화점 같은 곳이다. 이곳에는 각종 저렴한 물건들이 많다. 질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꽤 많은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주방용품도 아쉬운 대로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도 주방용 칼은 없다.
좀 더 중심가로 가보기로 했다. 자전거의 나라답게 자전거 용품점이 많다. 악기사도 눈에 많이 뜨인다. 하지만 주방용품점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한참 헤매다 주방용품 진열해 놓은 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엔 고급 브랜드 용품 전시장인 듯 값 비싼 물건들이 황제처럼 자리잡고 있어서 자취생이 편하게 사용할 주방칼은 찾기 힘들었다. 아니 15유로 이하의 칼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동네 마켓에만 가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칼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맸다.
할 수 없이 아시안 마켓에 가 보기로 했다. 오늘 안으로 꼭 구하고 말리라.
중앙역 근처에 있는 제법 커다란 아시안 마켓울 찾아 갔다. 마켇문을 열자마자 나를 기다렸다는 듯 오른쪽에 칼이 진열되어 있었다. 각종 주방용 칼이 반짝이며 내 손에 들리기를 기다렸다.
정육점에서 보았던 네모난 모양의 큰 칼, 회를 뜰 때 사용하는 예리하게 날이 선 긴 칼, 마늘을 통째로 쳐서 다지는 네모진 칼들이 쌓여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주방용 칼도 딱 한 자루 놓여있었다. 더구나 그 칼은 다른 칼들보다 저렴한 3.99유로 가격이다. 칼자루를 잡고 써는 흉내를 내 보았다. 가볍고 날도 예리하다. 기쁜 마음에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격을 지불하자마자 날듯이 집으로 왔다.
작은 과도로 독일의 길쭉하고 단단한 당근을 썰 때마다 썰기보다는 톱으로 켜는 느낌이었는데 사각사각 잘 썰린다. 내친김에 당근 5개를 채쳐놓고, 작은 칼로 쩔쩔맸던 양배추도 반으로 뚝딱 썰어 가늘게 채 쳐 놓았다.
"썰어야 하는 건 다 가져와"
의기양양하게 칼을 들고 호령하는 내게 아들은 찬물을 끼얹는다.
"저는 그 칼 무서워요. 작은 칼이 편할 것 같은데요."
이 칼을 사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오늘부터 아들에게 칼 쓰는 연습부터 시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