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한 약속이 있는 날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는 횟수가 더 잦다. 아 참 열쇠, 핸드폰은 어디 갔지? 서류, 아이고 안경은 또 어디 간 거야? 최근에 들었던 말도 깜빡깜빡하고 해야 할 말도 가물가물 거릴 때면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내가 치매가 왔나?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 메모 덕에 급하게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발걸음이 다소 무거울 뿐이었다.
마음속에 늘 빚으로 남아 있는 분이 있다. 빚은 갚아야 할 의무가 있는 묵직한 짐 덩어리이다. 하지만 이 빚은 내 생애에 두고두고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사랑의 빚이다.
그분은 내가 중학교 때 우리 교회의 담임 목사님으로 오셨다. 하얀 피부에 훤칠한 키, 아나운서 같은 목소리까지 겸비한 귀공자 이미지였다. 교회 어르신들은 그분을 '노주현 목사님'이라 불렀다. 사모님 역시 뽀얀 피부에 사슴 같은 눈망울, 성악을 전공해 찬양을 부를 때마다 나나 무수꾸리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교회 어른들은 그들에게 정을 주려하지 않았다. 몇 년 있다가 곧 떠날 거라며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했다. 시골교회와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10여 년 동안 시골교회뿐만 아니라 마을 분들과도동고동락하였다.
모내기철에는 자전거에 시원한 음료와 수박을 싣고 새참이라며 나누어 주셨다.가을걷이를 할 때면 구성지게 풍년가를 부르며 함께 낫질도 했다. 저녁이면 시골교회 수준에 맞는 성경공부 책을 손수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컴퓨터는커녕 워드프로세서 조차 없어밤새 타자기로 글자를 엮어 놓아야 했다.때로는 기름종이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렸고 등사기로 밀어 인쇄를 했다. 인쇄된 용지에 풀칠을 하고 테이프 두르는 작업까지 손수 하여 만든 책을 교인들 모두에게 나눠주셨다.
타닥타닥...
늦은 밤까지 담을 넘어 들려오는 타자 소리를 들으며 도와드릴 생각은 않고 한 권 두 권 쌓이는 성경교재에 흡족해했다.
오후늦도록 교회에 있으면 목사님은 큰 소리로 "함께 저녁 먹자"라고 부르신다. 네댓 명의 아이들이 사택으로 몰려가면 사모님은 누룽지를 끓여 한 그릇씩 나누어 주셨다. 그 당시 목사님 댁은 왜 매일 누룽지 밥만 드실까 궁금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밥은 여유가 없는데 목사님은 학생들을 불러오고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밥을 급하게 할 수는 없어 눌려놓은 누룽지를 끓여 나눠 먹었던 것이었다. 덕분에 목사님 댁 누룽지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누룽지 밥은 온 마을 가득 구수한 사랑을 퍼뜨렸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원래 38선 이북이었는데 6.25 전쟁 후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남한이 되어 토박이들이 거의 없이 실향민들의 땅이 되었다. 그러니 사는 곳에 대한 애착심이나 애향심이 없이 돈만 벌면 떠나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때 목사님 내외분은 마을을 사랑하자는 계몽운동에 힘썼고 교회에서도 은대리를 사랑하자는 의미의 교회가를 매주 불렀다. 여러 곡이 목사님과 사모님에 의해 탄생되었다.
세뇌가 된 걸까? 사랑의 은대리, 축복의 은대리를 목청껏 부르다 보면 어느새 은대리는 축복의 땅으로 느껴지고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 들었다.
진심은 언젠가는 통한다더니 교회 어르신들뿐만 아니라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까지도 차츰 마을에 대한 애향심을 갖게 되었고, 목사님 내외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분들이 교회와 마을을 떠날 때는 떠난 사람 연연하면 새로 오는 분이 섭섭해할 것이라면서 조용히 정을 거둬가셨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걸까? 헤어진 지 30년이 넘도록 서너 번 방문을 하고 잊고 지내던 어느 날 사모님 번호로 전화가 왔다. 목사님 목소리였다. 여전히 가슴 설레는 바리톤의 목소리였지만 말끝이 떨렸다. 사모님이 아프시다는 것이다.
'어디가 어떻게….' 말문을 흐리는 내게 사모님이 치매가 왔노라고, 많은걸 기억하지 못하는데 은대리 추억이 떠오르는지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 이름을 부르며 보고 싶다고 했단다. 한번 와줄 수 있냐는 부탁을 어렵사리 하시는 것이다. 당장 가겠노라며 방문시간을 약속했다. 가는 내내 사모님은 과연 우리를 얼마나 기억할까? 얼굴은 알아볼까? 걱정이 앞섰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 사모님은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불러 주며 안아주었다. 약간 부은 듯한 얼굴,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빼고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은대리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마치 며칠 전에 있었던 일처럼 그때의 얼굴 표정이나 말투까지 모두 기억해냈다. 그리곤 칭찬을 곁들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이렇게 와줘서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00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네. 00은 더더욱 예뻐졌네. 우리 찬양할까? 내가 피아노 쳐 줄게.”
쉬지 않고 30여 년 전의 일들을 실타래 풀듯 연신 풀어놓았다. 그러면서도 감사하다, 사랑한다, 예쁘다, 최고야, 라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 낸다. 우리를 만나고 기억의 한 자락을 더 기억하게 되었다고 목사님은 기뻐한다. 뭐가 그리도 힘드셨던 걸까? 왜 자꾸 과거로만 돌아가고자 하는 걸까?
치매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된 말로서 ‘정신이 없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치매는 정상적인 지적 능력을 유지하던 사람이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뇌기능이 손상되면서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이 초래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기억력, 언어능력, 판단력, 사고력 등의 지적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되어 어린아이처럼 말을 한다거나 이유 없이 고집을 부리며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심하게는 폭언을 한다. 이러한 진행성 치매는 뇌의 질환이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발병률이 증가한다.
몇 년 전 요양원에서 실습을 했다. 치매 환자들과 놀이수업을 하고 목욕도 해드리고, 속옷 갈아입히기 등을 했다. 어떤 환자는 실뜨기 놀이를 하다가 도구를 집어던지며 실습생을 물어뜯기도 하고, 속옷을 갈아입힐 때는 누군가 속옷을 훔쳐간다며 갈아입은 옷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분도 있었다. 목욕을 해드리는데 꼬집지 말라며 욕을 하는 분도 있었다. 환자의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옷장 정리를 하다 보면 변을 뭉쳐서 휴지로 꼭꼭 싸놓은 것을 보기도 한다. 그것은 요양원을 나갈 때 쓸 차비, 즉 금덩이라고 절대로 버리지 못하게 한다.
중증 치매 환자를 가족들이 돌보기란 웬만한 노력으로는 힘들다. 효도하는 마음이나 사랑으로 돌보고 있지만 그에 따르는 정신적인 인내가 무엇보다 필요한 기약 없는 돌봄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간호로 가족들은 지쳐갈 수 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우리는 사모님의 치매를 이쁜 치매라고 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누구에게든 감사와 칭찬의 말을 하며, 옛사람들을 어제 만난 듯 기억하여 대화하는데 조금도 어색함이 없다. 또한 어떤 음식이든 잘 드시고 지나친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곁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고 작은 요구를 다 들어준다는 건 쉽지 않다. 치매 환자는 자주 찾아뵙고 옛 추억을 함께 떠올리며 놀아드리는 것만으로도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한 가족에게 작은 쉼을 선물하는 것이니 가정에서 환자를 돌보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사랑의 빚을 갚으러 간다. 아니 잊고 지냈던 감사의 시간들을 찾으러 간다. 사모님은 오늘 내게 어떤 칭찬을 해줄지 기대를 하면서 낡은 앨범에서 찾은 빛바랜 추억 한 장을 살며시 꺼내 본다. 사진 속 밝은 미소가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