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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Nov 21. 2019

엄마의 모기장

엄마의 생신을 앞두고 찾아뵙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노랑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감자꽃 위를 날다 꽃 위에 앉아 날개를 접습니다. 별처럼 생긴 하얀 감자꽃은 이파리 속 노란 꽃밥을 기도하듯 가지런히 모으고 있습니다. 노랑나비가 제 옷을 감추려는 듯 꽃잎 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밉니다. 감자알이 실하게 영글라고 꽃을 따던 엄마가 살그머니 바구니를 내려놓습니다.

 “우리 정숙이가 왔구나. 노랑 옷을 입고 가더니 노랑나비가 되어 왔구나.”

살며시 다가가 손을 뻗치니 노랑나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노랗게 노랗게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갑니다.

  “정숙아 노랑 정숙아, 어디 가니. 엄마 여기 있는데…….”

엄마는 나비를 따라 논두렁 밭두렁을 훨훨 날아다닙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져도 엄마는 나비만 쫒아갑니다. 하늘 높이 날아간 나비가 보이지 않자 털썩 주저앉아 컥컥 울음을 토해냅니다.

  “에구 또 이러고 있구먼. 어서 들어가. 뭐라도 먹고 기운을 차려야지.”

  “자식새끼 앞세워 보낸 년이 무슨 염치로 밥을 먹어요. 아 저기 우리 정숙이가 다시 오네요. 정숙아, 아가…….”

 엄마는 일어나 겅중겅중 뛰어가다가 갑자기 배를 움켜쥡니다. 한참을 그렇게 꼼짝 않고 서 있던 엄마는 눈물범벅이 되어 환하게 웃습니다.

  “우리 아가가 뱃속에서 발로 찼어요. 두 번. 딱 두 번 내 배를 세차게 찼어요.”

 그제야 엄마는 입에 밥을 가져갑니다. 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뱃속에서 허기져 있을 아가를 위해 양분을 만들려고 허겁지겁 먹습니다.

  



이렇게 제가 태어났습니다. 봄맞이로 바쁜 시골의 봄날. 여섯 살 된 딸을 앞세워 보낸 엄마의 뱃속에서 살려고 발버둥 쳐 찌는 복더위에 미숙아로 태어난 것입니다. 제 언니처럼 홀연히 떠날까 봐, 그러면 호적에 빨간 줄 하나 더 긋는다고 다음 해 봄까지 살아있을지 지켜보자고 했답니다. 더디게 크는 나를 키우기보다는 언제 제 언니를 따라갈지 몰라 힘겹게, 애처롭게 살폈다고 합니다. 덕분에 나는 해가 바뀌는 첫 달에 겨우 호적에 올라한 살 나이도 잃어버린 채 얼굴도 보지 못한 언니의 몫까지 건강하게 살아내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 오십을 못 넘긴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엄마는 구십 세를 넘기며 막내딸과 함께 흰머리를 세어봅니다. 이젠 떠나야 하는데 질긴 목숨 끊어지지도 않는다고 거짓말처럼 건강하게 세월을 붙들고 있습니다.

  두 해 전부터 엄마의 집은 모기장 속입니다. 정숙이가 갓난아기 때부터 모기에 잘 물려서 모기장을 쳐 줘야 한다며 침대 위를 모기장으로 덮었습니다.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에도 모기장 사방에 빨래집게로 촘촘히 채웠습니다. 모기가 들어오는 구멍을 막아야 한다며 날마다 집게를 사 모읍니다. 모기장 주변엔 모기 잡는 약으로 그득합니다. 스프레이형, 연기형, 전자모기향, 쑥뜸까지 모기 잡는 제품 수집가처럼 모기 그림이 그려 있는 것이라면 사서 진열해 놓습니다. 날마다 뿌리고 연기를 피우는 통에 방안은 메케한 연기로 뿌옇습니다. 그제야 엄마는 배시시 웃습니다. 정숙이가 이제 편히 잠들 거라며 또 한 번 스프레이를 자랑하듯 뿌려댑니다. 지금 밖은 겨울 한파로 종종거리는 발걸음조차 얼어갑니다. 엄마의 침대에만 여름입니다. 모기가 득실거리는 한여름입니다.

  

  찜통 같은 여름 복지경에 태어난 나는 겨울이 싫습니다. 그 더운 여름에도 신생아는 석 달 열흘 동안 꽁꽁 싸매야 한다며 번데기처럼 둘둘 말아 키워서 여름 더위는 문제도 아닙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은둔자가 되어 책 속에 묻혀버립니다. 전기장판의 온도를 한껏 높인 채 배를 깔고 김애란 님의 『바깥은 여름』을 읽습니다. 「입동」 부분을 읽다가 엄마 생각이 났습니다.

  새집 장만하여 아들 방과 주방을 가장 정성 들여 꾸며놓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영우 엄마가 등장을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네 살배기 아들이 후진하는 어린이집 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하늘나라로 갑니다. 믿을 수 없고, 믿어지지 않는 그 사실에 망연자실한 영우 엄마. 그 어린이집에서 보낸 복분자를 어찌할지 몰라 베란다에 방치해 두었는데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음식을 해주러 와서 잔뜩 부푼 복분자 뚜껑을 열다가 새 주방 벽에 벌건 흔적을 남겼습니다. 영우가 흘린 핏자국처럼 선명합니다. 영우 엄마는 그 주방을 볼 때마다 영우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장 새 벽지를 사 옵니다. 그러나 영우 엄마는 어두운 주방 구석에서 날마다 흐느끼기만 합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영우 아빠의 가슴도 메어옵니다.   

  자식 앞세운 에미가 벌 받아 이렇게 오래 사는 거라던 모기장 속 엄마의 눈물 섞인 한숨도 스치듯 지나갑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 도배를 하자는 아내의 말에 풀 먹인 벽지를 붙잡고 있는 책 속의 영우 아빠가 대견합니다. 난 그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모기장을 칠 때마다 한겨울에 무슨 모기가 있냐고, 정신 차리라고, 내가 왜 정숙이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밤새 이를 잡겠다고 엄지손톱을 얼마나 마주쳤는지 쪼개지고 문드러져 손톱이 빠져 버렸는데도 엄마는 검지 손톱으로 방바닥을 암팡지게 눌러댑니다. 벌게진 두 눈은 보이지도 않는 이를 찾느라 초롱초롱하기까지 합니다. 엄마의 손바닥에 밴 안티푸라민 냄새가 코를 자극합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맞습니다. 잊고 지낸 줄만 알았는데 엄마는 날마다 여섯 살 딸만 기억해 냅니다. 가끔 정숙이가 꿈에 나타나 업어달라며 조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허리가 아파 일주일을 꼬박 누워 있어야 했고, 나는 엄마를 대신해 밥하고 청소를 해야만 했습니다. 이젠 그만 털어버리라고 소리치면서 모녀의 질긴 줄을 강제로 끊으려 했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타인의 아픔은 결코 내 아픔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로하려 해도 아픔까지 도려낼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픈 상처를 건드려 더 아플 뿐입니다. 세상에 아파하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꽁꽁 싸매고 있어 모를 뿐입니다. 하지만 바깥은 늘 여름입니다. 어렵게 차가운 손을 내밀어도 더운 여름은 찬 기운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동병상련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백세도 넘게 살 거라는 의사의 호언장담대로 건강하게 사시던 아버지가 아흔의 나이에 병원 과실로 하늘나라 문을 두드렸을 때, 사람들은 호상이라며 애써 나를 위로하려 했습니다. 부모의 죽음 앞에 호상이라는 말이 과연 어울리는 걸까. 씁쓸한 생각에 슬며시 위로자의 손을 놓았습니다. 나도 위로한답시고 아픈 말들을 생각 없이 내뱉었을 것 같아 조용히 회개합니다. 겨울과 같은 찬 마음 앞에 나는 여름으로 다가갔을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차디찬 마음에 따뜻한 계절을 맞이하려면 바깥으로 한걸음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씩이라도 꽉 닫힌 문을 열어젖힐 때 겨울과 따뜻함이 만나 봄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픔을 치유하고 세상 문을 열 때까지 오래 기다려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함께 벽지를 붙잡고 얼룩진 벽에 도배를 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번 겨울엔 엄마의 모기장에 들어가 엄마의 여름을 함께 지내렵니다. 찬 겨울에도 모기장을 뚫고 들어 올 모기를 향해 에프킬러 너 댓 발 엄마와 함께 쏴 주렵니다. 그리고 토닥토닥 엄마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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