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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평선 Dec 09. 2019

아플 시간도 없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만 하루 동안 해낸 일들

독일을 떠나 한국에 도착한 지 만 하루가 지났다. 하루 만에 많은걸  해냈다. 으로 한국에 머물 짧은 시간 동안 해야 할 스케줄 정리를 하는데 머리가 아프다.


어제. 그러니까 인천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온 날이다. 남편 홀로 두 달 넘게 지냈던 집. 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겉보기엔 괜찮아 보였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듯했다. 말 그대로 '정돈되어 있는 듯' 한 것이다. 일단 눈에 거슬리는 것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더 문제였다. 필요한 것을 찾으려니 구석구석 쑤셔 박아 놓아서 꺼낼 때마다 줄 코 나오듯  줄줄이 이어서 나온다. 옷이며 수건들이 뒤섞여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다.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 갔다. 거기까지는 남편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듯 세면대며 변기는 물때로 회색빛 수준이다. 그냥 나올 수 없어서 화장실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걸 본 다음에야 점심을 안 먹었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점심 먹자며 식탁을 차렸다. 반찬통 째로 늘어놓았지만 잔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약간 간이 진한 된장찌개가 큰 냄비 가득 넘실 댔다.

간이 좀 짜져서 물을 붓다 보니 양이 많아졌다느니 마늘이 없어서 맛이 안 난다는 둥 찌게에 대한 평을 스스로 늘어놓고 있다. 맛있다고 하니  입가에 헤벌쭉 미소가 번진다.


짐 정리를 하는 동안 남편은 설거지를 마치고 강아지 산책시다며 밖으로 나간다.  
커다란 김치통이 통째로 냉장고에 들어가는 걸 본 나는 통 정리를 하려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는 꽉 차있는데 반찬은 실속이 없다. 냉장고 청소를 하면서 반찬들을 작은 통에 담아 놓고 나니 냉장고가 휑해졌다.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숨어 있었다. 독일 가기 전에 요리하기 편하도록 채소별로 팩에 담아 넣고 갔는데 모든 야채들이 썩어 있고 곰팡이까지 나 있었다. 당장 김치냉장고 정리를 해야 했다. 썩은 것은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모두 담고 비닐도 씻어서 모으니 커다란 봉투에 가득했다.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계란 한 판(10개씩만 사 오라 해도 꼭 한판씩 사 오는 남편이다), 대파 한 꾸러미, 어묵 두 봉지, 버섯 세팩, 콩나물 두 봉지, 두부 두모를 던져 놓는다. 다음날이 주일이라 교인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사 오라 했더니 한아름 안겨준다. 깨끗해진 김치 냉장고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강아지는 괴성을 지르며 반겨주었다. 진정할 때까지 한참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었는데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남편이지만 내가 집 떠난 후 두 달간 욕도 몇 번 안 시켰다는 것이다. 산책을 다녀오고 나면  또 땀나고 냄새나니 산책 다녀온 지금 씻겨야 한다.

목욕시킬 때마다 다리도 잘 들어주고 얌전히 있던 강아지가 물소리에 기겁을 하고 다리를 들어주는 것조차 잊어버린 듯했다. 다 씻기고 드라이로 털을 말려 주 나니 예쁜 강아지로 돌아왔다.

보통 때 같으면 꼬를 차며 아양을 떨었는데 제 집에 들어가 오지도 않는다. 단단히 삐친 건지, 개운한 건지 제 집에서 내 눈치만 살피다가 스르르 눈을 감곯아떨어졌다. 나도 씻고 나니 잠이 다.


하지만 남편은 아이들과 지낸 두 달간의 이야기보따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이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시간이다.


오랜만에 떡라면을 먹자며 남편이 끓여준다. 정리가 된 냉장고를 보더니 늘 꽉 찼었는데 모두 버린 거냐고 묻는다. 반찬통 크기만 바꿨을 뿐인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 준비로 바빴다. 콩나물을 삶아 무치고 호박 새우음, 버섯 양파볶음, 어묵조림, 밥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두부는 꼭 짜서 동그랑땡을 했다. 몇 가지 안 되는 반찬을 준비하는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예배 마친 후 식사를 하고 뒷정리까지 하고 나니 3시가 넘었다.

5시 학부모 모임에 가려 서둘러야 했다.  출발을 했는데 길이 막혀 조금 늦은 시간에 도착을 했다. 다섯 분의 학부모들과 자녀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니 9시가 넘었다. 먼 곳아이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온 분도 있기에 일찍 헤어질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밀린 프린트를 다. 오랫동안 프린가 정지해 있었던 터라 한참 동안 노즐 청소를 해야 했다. 모두 마치고 나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씻고 나니 피곤이 몰려온다.

독일과 8시간 차이가 나니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각이 지금이다.  누워서 톡을 나다.

 "시차 적응 시간도 없이 그  많은걸 해내셨네요."


해야 할 일이 많을  아플 시간 조차 없다. 그런데 그것이 나를 나답게 만든다 생각을 하며 바쁨을 즐기고 있는 나를 본다. 이것도 병인 듯.

필리핀으로 떠나기 전까지 해야 할 일이 하루도 빠짐없이 채워져 있다.

아프면 안 되니까 이제 잠들어야 한다. 늦은 밤 동네 개들의 컹컹대는 소리에 쉽게 잠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쉴 시간 필요하다. 눈부터 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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