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엄마는 어딨는데?
2년 전 추석, 정신병동에 입원해있는 엄마를 데리고 나와 친척집에 제사를 지내러 갔다.
"너네 엄마는 어딨는데?"
엄마가 대뜸 차 안에서 물었다. 순간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심장이 내려앉았다.
"엄마 여기 있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아니 말고 나는 니 이모잖아-."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전보다 더 자주 '니 몇 살이고?', '학교 졸업했나?', '무슨 일 하는데?'하고 자주 물었다.
증상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치매는 시간, 장소, 사람 순서로 최근 기억부터 잃어버린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장소에 대한 기억을 잃고 있었다. 갑자기 집을 나가서는 돌아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해 경찰에 실종신고를 해야 했다.
지금의 치매 국가책임제 정책이 생기기 전까지는 '정신질환으로 인한' 인지력 저하에 의해 치매 증상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치매 진단과 약을 처방받지 못했다. 그리고 치매환자가 의사 앞에서 갑자기 평상시 인지 능력보다 양호한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조차 검사 과정에서 감안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이 사실들은 그 당시에 쉽게 알아낼 수 없었다. 물리치료과 전공 특성상 치매에 대한 이해가 교육과정에 포함되기 때문에 대학생이 되어서야 엄마의 증상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치매가 엄마의 기억에서 나를 지운 건지 확인하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나는 엄마를 불렀다.
"엄마."
"왜?"
마음이 놓였다.
“아깐 엄마 어디 갔냐매? 이젠 기억났어?”
그러자 엄마가 "응."하고 대답하곤 덧붙여 말했다.
“요즘 자꾸 기억이 오락가락한다 그래서 말을 잘 안 하잖아, 실수할까 봐..”
엄마 어딨냐고 묻던 엄마가 부르면 대답하는 게 귀여워 웃다가 이내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치매 환자에게는 하루 중 정신이 또렷하게 명료해지는 시간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엄마를 더 힘들게 만들진 않을까 하고 마음이 먹먹했다.
한동안은 치매에 걸린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잊히는 사람이 자녀라는 게 가장 슬펐다.
어느 날엔 문득 이런 의문을 가졌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면 이전의 엄마와 다른 사람이 되는 걸까? 아니면 그 또한 일부의 모습인 걸까?'
그녀의 기억 속엔 나와의 추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내가 알던 모습, 성격, 말투, 취향들과도 다르다. 영락없이 다른 사람 같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들여다보니 내가 추억하는 엄마의 모습으로 여전하길 바라는 내 마음이 욕심인 것 같았다.
병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그들에게 배운 것들이 많다. 간혹 환자분의 인품에 감동하여 덕분에 배운다며 감사를 표하면 종종 어떤 환자분들은 이때까지 본인이 형편없이 살아왔다며 자신의 과거를 몰라서 좋게 보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날 만나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상대에 따라 여러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친구마다 보이는 나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내가 알고 지내온 이 사람은 순수하고 인간미 있는 사람이었다.
'난 지금 좋은데 굳이 지나간 과거에 맞춰 생각을 바꿔야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가졌던 의문도 답이 내려졌다.
엄마가 나를 기억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지금 함께 보내는 시간이 즐겁다면 그걸로 된 거였다. 기억을 못 해도 여전히 나의 엄마이니까.
엄마가 내 이름을 바꿔 부르면 '왜?'하고 대답했고,
나를 조카로 알면 조카가 되었고,
갑자기 화를 내면 무슨 일인지 귀 기울이고 맞장구쳤으며,
같이 놀고 싶을 땐 쌀보리 게임을 알려주었다.
치매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부질없이 엄마의 말에 걸고넘어지고 다투곤 했다.
치매 그 자체는 슬픈 것도, 화나는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국가의 도움 없이 가족 안에서 대비하고 책임져야 하는 그 상황들이 힘들게 만든 것일 뿐이었다.
내가 병원에서 만난 대부분의 치매에 걸린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오히려 아이 같은 순수한 매력을 발산하여 주위 사람들을 반하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심리적으로 힘들게 했던 내 직업 덕분에,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들을 일찍 알게 되었다.
사진_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