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4

by 연후 할아버지

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3) 결혼 후의 일본 유학과 씨름선수 <쪼끄마니>


나중에 처남이 된 근호 씨가 기용 씨의 열렬한 팬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그는 자신의 부친(나의 외할아버지)를 설득하고 큰 누님(나의 모친) 우순 씨에게 바람을 넣어 혼사를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장인 될 분과 처음 대면할 때, 집안 사정을 얘기하고 결혼자금이나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하자, 그분은 거금을 선뜻 내주며 결혼 자금으로 쓰고 남으면 집과 농토도 약간 마련해 분가를 하라고 하시더란다.


그러나 돈이 손에 들어오자 기용 씨는 일본유학을 가려는 엉뚱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에 그의 셋째 형 삼용 씨가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여비만 마련해 그곳으로 가면, 자신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인식만 대강 마치고 새색시는 친정에 그대로 둔 채 형을 찾아 동경으로 갔는데, 막상 도착해서 함께 살아보니 고학을 하고 있던 형에게 짐이 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귀국하겠다 말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서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않고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오사카로 옮겨갔는데, 운이 좋았는지 그 도시 귀퉁이에 있는 중학교 비슷한 곳에 입학할 수 있었다. (비슷한 곳이라고 표현하신 걸 보면, 정식으로 인가받은 학교는 아니고 학원이나 강습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유학 간 학생들은 대부분이 대학생들이었고 친일파의 자제들이 주류였지만, 사회주의 사상에 빠지거나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많았던 시절이었다.


나이는 그들과 비슷했지만 덩치는 오히려 큰 편이었던 <쪼끄마니>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휩쓸려 교우하고 대학생 행세를 하며 지냈는데, 아무도 그가 중학생인 줄로는 의심하지 않더란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었다. 처음에는 처가에서 얻은 돈을 아껴 쓰고 틈틈이 노동을 해 보충하며 공부를 했는데, 그들과 휩쓸린 후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연속해서 일하는 게 어려워져서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많아지니 넉넉하지 않았던 주머니가 차츰 비어 갔다.


이역의 객지라 도움을 받을 데도 없어 굶는 일이 잦아졌는데, 그 결과는 영양실조와 각기병으로 나타났다. 돈은 떨어지고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경찰에서는 <요주의 조선인>이란 딱지까지 붙여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니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었다.


결국은 졸업도 하지 못한 채, 스물세 살의 건장하던 젊은이는 노인처럼 피폐한 몰골로 변해 지팡이를 짚고 귀국을 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해 쓰러져 며칠을 인사불성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어서 인척들에게 인사를 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멋쩍어서 아픈 척하고 누워 있었을 수도 있다.)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처가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장인께서 안달이 나셨던 것 같다. 사돈댁 방문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병문안을 와서 목숨은 건지는 게 우선이라 자존심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말씀하시며, 새로 구입한 땅과 집문서를 건네주고 가시더란다.


사위와 딸의 독립을 위해 직접 돌아다니며 계약하고 사셨을 것이다.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그분 뜻에 따라 분가해 나갔는데, 그가 좋아하는 처남 근호 씨만 가끔 들릴 뿐 세상과는 단절하고 살며 장인의 말씀대로 건강 회복에만 전념하였다.


그런데 근호 씨가 문제였다. 일본 유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질문이 많아서 생각지도 말라고 처음부터 단호하게 잘랐지만, 호기심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지만, 그의 부친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얼마 후에는 일본으로 떠나버리고 말았는데, 그게 그와의 마지막 상면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그곳에서 몇 년을 공부하다가 전쟁 통에 학도병으로 입대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통지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기용 씨는 그동안에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서 강가로 나가 사람들과 씨름만 하며 지냈다. 얼마 후 추석 때 큰 씨름판이 서면 다시 한번 황소를 따서 농사일에 쓰겠다는 계획도 세워 놓았는데, 그가 원하던 대로 장사는 되었지만 상품은 쓸모가 없어져 버렸다. 형제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만주로 이주를 해서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봄에는 가뭄이 계속되어 밭농사를 망쳤고, 여름에는 홍수가 져서 식구들의 식량이 부족했는데, 일본이 조선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서 달콤한 말로 권유했다고 한다.


옮겨가기만 하면 땅과 식량을 공짜로 주고 모든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선전을 했고, 실제로도 그 방법 외에는 당장의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아,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처가가 부농이라 식량 걱정은 없었고, 아내인 우순 씨가 첫아이를 임신해 해산달이 가까웠던 기용 씨는 형제들을 바로 따라나서지는 못했다. 씨름판에 점찍어 놓은 황소가 눈에 아른거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아무튼, 모두들 살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치던 그해에 기용 씨는 삶의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들을 여러 가지 만났다. 아내가 장남을 출산했으며, 각지의 씨름판에서는 비교적 작은 체구로 우람한 덩치들을 넘기는 그의 기술씨름이 크게 인기를 끌어 <쪼끄마니>라고 불리며 그가 떠야 씨름판이 흥행할 정도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거의 빈손으로 객지로 떠나보낸 모친과 형제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역만리 북녘 땅 추운 곳에서 떨고 있지는 않는지,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사람도 없는데, 관리들은 어떻게 상대하고 있는지,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다음 해 봄에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대동하여 만주로 올라갔다.


4) 만주에서 학교를 세워 운영함


만주에 도착해 보니, <쪼끄마니>라는 그의 명성은 그곳에도 자자하였다.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씨름만 해도 생계 걱정은 잊어버려도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처음 몇 년은 우승도 여러 번 했고 수입도 상당해서 형제들을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다. 어쩌면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지금부터는 가능하면 기용 씨라는 이름대신에 <쪼끄마니>라는 별명으로 부르려 한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의 법칙은 그리고 비껴갈 수는 없었다. 삼십 대에 접어들자 기술이 노출되고 지구력도 떨어져 높은 인기만큼 실적이 나오지 않았다. 처음 몇 판의 경기는 이길 확률이 높았지만 판을 거듭할수록 힘이 빠져 지는 일이 잦아졌다.


마지막 황소를 따던 날도 그랬다. 몇 판만 이기면 되는데, 지쳐서 앉은자리에서 일어설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근육주사 한 방을 찔러 줬다. 피곤이 금방 시리지고 날아갈 수도 있을 듯한 상태로 변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아편 주사였다. 그때는 도핑테스트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라. 운동선수 중에는 중독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쪼끄마니>는 몇 달간의 고통을 견디면서 마약을 끊었는데, 그동안에는 씨름과도 당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또한 씨름을 실내가 아닌 들판에서 하는 운동으로 알던 시절이었는데, 만주는 여름이 짧고 겨울은 긴 추운 곳이었으므로 일 년 중에 이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되어 있었다.


쪼끄마니는 씨름을 할 수 없을 때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숙>이라 부르던 (하숙이라 할 때 숙(宿) 자 같은데 그게 왜 학교라는 뜻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기숙학교의 줄임말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쪼끄마니의 학교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립학교를 지어 스스로 교장선생님으로 취임했다.


학교 이름이 일본식이어서 일본어로 교육시켰던 게 아니었나 싶어서 물어보니, 교명은 의심받지 않으려 위장한 것이고 일본에서 함께 공부하던 옛날 동료들이 합류해 조선인들에게 한글과 한문 그리고 우리 역사를 가르쳤던 곳이라 한다.


그랬다면 애국자요 민족주의자였으니 해방된 조국에서 공로를 인정받아야 마땅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일본 관리들의 협조를 받지 않고는 유지할 수 없었던 조직의 대표라, 겉으로는 친일파 행세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점도 있었단다. (한동안은 잠잠하더니, 최근에 다시 ‘친일파’니 ‘뉴라이트’니 하며 역사 논쟁이 분분하던데,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본인 밖에 몰라 제삼자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keyword
이전 10화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