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6

by 연후 할아버지

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6) 만주에서 귀향 후의 몇 년


때마침 셋째 형님 삼용 씨가 세상 돌아가는 것도 관찰하며 보부상처럼 인삼장사나 하러 떠나자는 제안을 해서, 시끄러운 속도 다스릴 겸, 갖고 있던 돈을 모두 땅속에 묻어두고 그를 따라나섰다.


삼용 씨는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서 총독부의 고위관리로 근무했던 분이라, 세상이 바뀐 후에 변해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상황이었다. 또한 고향에 머물다가는 친일파로 처단될지도 모르니 피해 도망을 다녀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쪼끄마니가 공공연하게 밝힌 세상에서 존경했던 분은 두 분이 계셨는데, 그중에 한 분은 자신의 할아버지(나의 증조부)였고, 다른 한분은 바로 친형님 삼용 씨였다.


그 두 분의 공통점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 공부를 많이 하셨던 점이었다. 자신과는 반대 성향의 사람들을 존경했다는 것은, 그에게도 지적 갈망이 강했지만 공부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기는 하지만, 천재 할아버지의 일화를 하나 더 삽입한 후에 다시 돌아오려 한다.


그분은 나의 조부 택기 씨의 부친인데, 아내가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어린 아들을 홀로 키우시다가 재혼한 후, 두 번째 아내와 아들 사이에서 상당한 갈등을 겪으셨단다.


그래서인지 세속에는 관심을 끊고 도인처럼 사시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독서를 많이 해서 세상의 모든 학문에 모르는 게 없었고, 특히 주역에 통달하여 예언 능력이 대단하셨단다.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으셨다는 분이 예언을 하셨다는 건 모순된 이야기지만, 그분은 모르는 게 없어서 자신의 사망일시까지도 예언하고 시간에 맞춰 돌아가셨다고 <쪼끄마니>는 굳게 믿고 있었다. (나의 논리적 판단으로는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게 아닌가 싶다는 의견을 말했다가 쪼끄마니에게 심하게 꾸중 듣고 혼났던 기억이 난다.)


그분께서 임종 직전에 손자들(<쪼끄마니>의 형제들)을 불러 앉히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셨는데, 그게 아직도 이뤄지지 않는다는 한탄을, 그의 형제들(나의 숙부들)과 함께 성묘 갈 때마다 노인들이 산마루에 앉아 쉴 때마다, 한숨을 쉬면서 하던 말들을 나도 여러 번 들었던 적이 있다.


“내기 죽으면 저 산 꼭대기에 무덤을 써라. 그러면 너희들의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너희들의 손자 대에 쌍둥이가 태어날 테니 그들을 중심으로 해서 뭉쳐라. 그가 집안과 나라를 빛낼 인물이다.”


손자들의 숫자가 많으니 분쟁이 잦았고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꾀를 내셨는데, 신비함을 더하기 위해 예수님의 탄생 신화를 더하고 예언자들의 흉내도 약간 보태셨던 것 같다. (그런데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그 아이들을 내 아내가 낳았다. <쪼끄마니>와 내가 모두 막둥이에 가까웠는데, 내 막둥이 아들이 그분께서 예언한 대에 처음 태어난 쌍둥이여서 영감님들이 그렇게 오래 기다렸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는 내가 인천에 살고 있을 때였는데, 그 전설적 예언 때문에 아이들에게 경배한답시고 시골노인들이 끝없이 상경해서 나는 그분들을 접대하느라고 혼이 났다.)


화제를 다시 해방직후의 삼용 씨와 <쪼끄마니> 쪽으로 돌리면, 그들은 인삼 배낭을 메고 몇 년 동안 돌아다녀 삼천리 방방곡곡에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돈을 벌려고 시작했던 장사는 아니었으므로 이윤이 생길 거라고 큰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계산상으로는 상당히 남았는데 살인적인 물가 상승과 화폐가치 하락 때문에 손해가 막심했다.


결국은 원금마저 까먹고 빈털터리가 되어 더 이상 장사를 지속할 수 없는 형편에까지 내몰렸다. 극심한 좌우익의 대립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을 위안삼아야 할 것 같다.


쪼끄마니가 처음 귀국했을 때는, 좌익에서는 학생운동과 반일활동을 했다는 공로로, 우익에서는 만주에서 돈을 많아 벌었다는 소문 때문에, 서로 자기편으로 여겨 호의를 베풀었는데, 시일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양쪽에서 모두 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해서 (테러가 성행하던 시기라) 수시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자신은 몸이 빠르고 강하니 상황에 따라서는 피할 수도 있고 순간적으로 닥친 위기를 타개해 나갈 수도 있겠지만, 도망만 다니는 건 가족까지 보호하는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선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위험은 배가될 것 같아 고민하고 있다가, 정부가 수립되자 공무원이 되면 수렁에서 벗어나겠다 싶어서 취직을 결심했다.


그때 삼용 씨는 자신은 역사의 죄인이라고 칩거하며 외부와 접촉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동생의 취직을 위해서는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고. 그 덕을 본 건지 부산시청에 특채로 발령장을 받았단다. (그곳에 근무하다가 6,25 동란을 만났고, 고향으로 피난 와서 잠시 머물다가, 다시 복직하여 공무원생활을 십여 년쯤 더 한 후 귀향했던 일들은, 내가 태어나고 부친과 재회하는 과정에서 산발적이긴 했지만 이미 썼으니 더 이상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 같다.)

keyword
이전 12화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