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이 환갑잔치를 하던 해에 나는 대학 2학년이었다. 그때 그는 다시 한번 내게 졸업 후에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을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지만, 집착에 가까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짜증이 나서 단호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지금까지 고전하다가 이제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귀향하라고 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평생 모은 농토 정도는 졸업 후 3년만 승선하면 모두 살 수 있답니다. 이제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아버지 노후 걱정이나 하세요.”
당시에는 선원들의 임금 수준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발언은 아니었지만, 좋은 날 잔치 자리에서 자존심을 긁고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옳았다.
그 대가를 치르는지 3년이면 구입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그의 재산 수준을 지금은 넘어섰는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내가 걸어왔던 길에 큰 후회는 없다. 요즘은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지난 일을 회상하며 반성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환갑이 지나고 나서 그는 금방 늙은 듯이 보였다. 손님도 줄고 출퇴근이 힘들다고 대서방(사법서사 사무실)을 닫은 후에는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요즘은 씨름대회도 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인기도 시들하고 젊은 사람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참가할 사람도 없어서 그것도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단다.
“그러면 마산 형님집 근처로 이사를 가세요.” 하고 권했더니, “나에게 벌써부터 뒷방 늙은이나 되라고?” 하시며 펄쩍 뛰시기에. “그래서 저에게 돌아와서 농사지으라고 하셨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반색을 하시며 “왜? 생각이 변하기라도 했느냐?” 하셨다.
이런 대화가 오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고향집으로 돌아갔더니, 울화병이 나서 쓰러지셨단다. 어떤 젊은이가 우리 산에서 소나무를 베고 있기에, 알아서 도망치라고 멀리서 소리를 쳤는데도 못 들은 척하더란다.
가까이 가보니 오래전에 우리 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사람이라 꾸중을 했더니 ‘종노릇을 그만큼 해줬는데 땔감 몇 그루 베어가는 게 그렇게 아깝습니까?’ 하고 대들었지만 대응할 마땅한 방법이 없어 속앓이만 하며 산을 내려오셨단다.
당신이 젊었을 때라면 발생할 수도 없고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노인이 세상을 하직하실 뻔하셨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나는 그 사람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미 몸을 피하고 난 후였다.
해프닝에 불과한 이 얘기를 삽입하는 건, 당시의 내 생각으로는 곧 이사를 가시겠다고 예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짐작이 틀렸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몇 년이나 더 그곳에서 버티셨다.
그 후에 내가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승선했는데, 귀국해서 보니 그동안에 막내며느리(내 아내)를 어떻게 꾀셨던지 내가 살던 집은 없어지고, 내 식솔은 하동본가로 옮겨가 살고 있었다. 아마 그로서는 오랜 염원의 마지막 시도를 해본 셈이었다.
아내가 아직 학업을 마치지 않았다는 구실로 나는 아내와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남을 데리고 다시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 일이 있고 난 후에는 포기를 하셨던지 시골 재산을 정리하고 마산에 있는 장남의 집 곁으로 이사하셨다.
그다음에는 휴가를 올 때마다 가끔 마산으로 가서 그를 만나 뵙기도 했는데, 이제는 <쪼끄마니>라 하기에는 체격이 많이 왜소해졌고, <오졸정센>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걸음걸이도 느려져 있었다. 목소리마저 힘이 빠져 축 늘어지고 측은한 늙은이로 보여서, 나는 마음이 상해 귀가하곤 했다.
한동안 육상근무를 위해 직장을 따라 인천과 서울로 옮겨 다니며 살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계속 태어난 후에는 돈이 필요해서 다시 승선을 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해운회사들의 선원부가 있는 부산으로 이사를 했다.
장남이 초등학교 4학년, 막둥이가 1학년 때였는데, 아이들의 숫자에 맞게 집도 크게 짓고 가재도구도 바꾸다 보니 예상했던 것보다는 지출된 게 많아서 육상 월급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마산과 부산은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는 손주들을 보살핀다는 명분으로 자주 내 집으로 오셨고 승선 중에는 장기 체류도 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내가 집에 없을 때의 얘기고,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것처럼 내가 집에 돌아오면 발걸음을 끊으셨다. 어렸을 때부터 당신에게 극렬히 반항만 했던 막내아들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서먹하고 어려우셨던 것 같다.
그런 세월이 몇 년 더 흐른 후에는, 쪼끄마니 부부가 아예 짐을 싸들고 내 집으로 거처를 옮겨와 살고 계셨다. 형님이 집을 개축하느라 방이 부족하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며느리(내 아내)가 모셔왔다니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활기찼던 옛날의 모습을 되찾으신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그동안에도 그분들께 나는 여전히 불편한 존재였다. 휴가를 오면 없는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슬그머니 마산으로 피하셨다가 승선하면 다시 오시곤 하셨던 걸 회억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신축한 집이 방도 많고 충분히 넓어서 두 분이 거주하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노인들이 함께 살다 보니 인사하러 오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나의 형제들과 조카들, <쪼끄마니>의 형제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그의 고향 친구들, 기타 등등의 친척들, 끊임이 없었다. 부근에 사는 친척들의 경로당으로 변했다.
특히, 쪼끄마니의 동생(나의 숙부님) 내외는 아예 집까지 싸들고 들어와 장기투숙객이 되시곤 했다. 생활비가 두세 배 더 나가는 거야 월급이 많던 때였으니 감당했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산만해져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던 건 심각한 일이었다.
형님의 집이 완공된 후에는, 며느리(내 아내)가 불평을 하기 시작했고, 그 때문에 노인들이 마산으로 가셨다가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시는 일이 자주 반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