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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쪼끄마니의 노후생활 2

by 연후 할아버지

4. 쪼끄마니의 노후생활



2) 아들과 손자의 차이


첫째) 학교선생님을 대하는 방법


앞에서 내가, 어렸을 때의 에피소드 몇 개를 나열했는데, 그중에는 초등학교 4학년 반장선거를 두 번 했던 얘기가 섞여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의 장남(당신의 손자)이 공교롭게도 옛날의 아비와 같은 나이가 되었고, 학교에서 유사한 일을 당하고 돌아왔는데, 그때 쪼끄마니의 대응이 흥미롭다. (두 가지 반응을 비교해 보기 위해 앞쪽으로 합칠까 고민했지만, 세월의 거리가 너무 멀어 혼선을 빚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발생시점에 맞춰 뒤로 따로 뺐다.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에, 나는 승선 중이어서 집에 없었으므로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고 아내에게서 들었던 얘기다.)


집을 새로 짓고 이사를 하는 등의 일이 많고 바빠서 전학을 시켜놓고는 어미가 학교에 가지 않고 제대로 인사도 못했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선생님이 편파적이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마침내 집에 와 계시던 쪼끄마니 노인께서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의 말을 듣더니, 아비가 클 때도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있었다고 위로하며 달래 봐도 울음을 멈추지 않자, 속이 상하셨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휑하고 대문 밖으로 나가셨다.


얼굴이 벌겋게 변한 영감님께서 씩씩거리던 상태로 봐서는 뭔가 사고라도 크게 치실 것 같은 기세라 신경이 쓰여서 내다봤더니, 공터에서 담배를 피우고 계셔서 그나마 안심은 되었지만, 한동안 끊었던 걸 다시 피우기 시작하신 건 마음에 걸리더란다.


조금 후에 다시 내다보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뒷산으로 산책이라도 가셨나 하고 여기고 있다가, 해가 질 때까지도 소식이 없어서 다시 걱정이 시작됐지만 행방을 모르니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찾아볼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어둠이 짙어졌는데도 돌아오시지 않아서 안절부절못할 때,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시며 마법사처럼 등장하셔서 온 식구가 평소보다는 약간 늦었지만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소리가 울려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여선생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영감님께서 무슨 일을 저지르시긴 하셨구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선생님 자신이 아이에게 한 짓을 사과하는 내용을 기대하며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전혀 예상 밖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더란다.

“할아버지께서 선물하신 과일과 양념들은 고맙게 잘 먹고 있지만, 다음부터는 남의 눈도 있고 하니 학교로 직접 가져오시지는 말라고 전해 주세요.”

깜짝 놀랄만한 반응이었다. 상냥한 말투로 봐서는 선물이 흡족했고, 학교로 가져오지 말라는 말은 집으로는 자주 보내달라는 뜻으로 여겨졌는데, 노인께서 직접 시장으로 나가셔서 최상품들을 사서 짊어지고 학교에 갖다 주며 시골에서 농사지은 거라고 거짓말을 하셨을 거라 추측된다.


과정이 어떻든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고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만, 이 얘기들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월과 연세가 변화시켰을 수도 있고, 아들과 손자의 느낌이 다를 수도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그건 내가 기억하는 나의 부친 <쪼끄마니>의 처세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나에게는 그렇게 쏘아대던 폭력적인 언사들을 손자들에게는 단 한번도 사용하지 않으셔서 영감님께 이런 비겁한 면도 있다고 마음속으로 비웃었지만,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도 할애비가 되고 보니, 내 자식들을 키울 때는 책임감과 의무감에 사로잡혀 부담스러웠지만 손자들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압박을 받는 건 부모 몫이고 조부모는 무조건 좋아하기만 하면 되었다.


아이들 버릇 나쁘게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며칠만 못 보면 금방 보고 싶고 깨물고 싶도록 예쁘기만 하다. 그래서 사랑은 물처럼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했던가 보다. 자연의 섭리요 하늘의 뜻을 인간이 억지로 역류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쪼끄마니와 손자들


내 아내의 말에 의하면, 쪼끄마니는 당신의 손자들(내 아들들)에게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자상한 할아버지였고, 아이들도 그를 좋아하고 따라서 며칠만 보이지 않아도 찾고 난리가 났단다.


새로 지어 이사한 집이 넓고 깨끗해서 살기에 편리했지만. 아이들의 학교 가는 길이 멀어서 버스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매일 미리 가서 자리를 잡아주셨고, 수업이 끝날 시간에는 교문 앞에 서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이 나오면 함께 귀가를 하시곤 하셨는데, 덕분에 눈비가 오는 날에도 걱정할 필요기 전혀 없었단다.


신설동네라 이웃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방범대책으로 진돗개를 몇 마리 키웠는데, 학교만 끝나면 바로 달려온 손자들과 할아버지는 뭣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개들을 몰고 산으로 올라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더란다.


날씨가 궂어 산에 갈 수 없는 날에는 아이들과 함께 윷놀이 판을 벌리기도 하고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는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어미에게는 이런 시아버지가 내칠 수도 없고 언제까지나 동행할 수도 없는 계륵 같은 존재였지만, 그 아이들은 자라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할아버지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훔친다.


셋째) 손자들과의 언약


내 아들들도 모두 고등학교 때의 나와 같이 문과였다. 시대가 달라져서 이과가 훨씬 직업 선택의 범위가 넓어졌다며 고생길을 벗어나 전과를 교려해 보라 해도 ‘아버지와 같은 엔지니어가 되는 건 싫다.’며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렸다.


그래서 그들은 어려운 길을 선택했고 반평생을 힘들게 살고 있다. 나도 또한, 여러 명 중 한 명이라도 내가 고생하며 얻은 경험들을 이어받을 사람이 나오면 좋겠다는 꿈을 가졌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모두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는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우연히 알게 됐다. 진로선택을 할 때 그렇게 고집을 부렸던 이유가 쪼끄마니에게 있었고, 할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어길 수가 없었단다.


그분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부탁을 하시더란다. “너희 아비에게는 내가 잘못한 게 많은데, 너희들이 할아비의 한을 풀어 달라.”고 하셨고,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굳은 언약을 했단다.


내가 진학할 때, 법과대학으로 가고 싶어 하는 걸 알면서도 당신이 막았다는 죄책감을 평생 지니고 사셨던 것 같다. 정작 본인은,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없는데, 아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 혼자 가슴앓이를 하셨던 것이다. 영감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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