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인 설명을 위한 연결고리를 만들어보려고 <쪼끄마니>에게서 들었던 그의 인생 초반기 얘기들을 삽입시켜 봤는데, 오히려 내용이 끊기고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아, 결과는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
타임머신을 탄 듯 시간여행을 너무 심하게 해서 오히려 혼동을 가중시킨 게 아닌가 걱정도 된다. 나는 아직도 여러 가지 이슈를 동시에 진행할 능력이 많이 부족한 것 같디.
샛길로 접어들어 몇십 년을 헤매다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 보니, 나는 아직도 중학생이고 <쪼끄마니> 치하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지만 집을 떠나 자유를 얻는 것은 내 인생에 중요한 기점이니 짧게라도 설명을 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다.
고등학교 진학문제를 두고 부친과 나 사이에 또 한 번 신경전이 벌어졌지만, 이제는 반쯤은 포기하셨는지 중학교 입학 때처럼 완강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의 장남(나의 형님)이 마산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을 때여서 그곳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겠다고 했더니, 이번에도 수석을 하지 않으면 학교 갈 엄두도 내지 말라고 엄포는 놨지만, 더 이상 반대는 없었는데, 그와 헤어질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떤 조건도 수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대환영이었다.
체력장에서 실수하는 바람에 점수가 조금 모자라 수석은 놓쳤지만, 상당한 액수의 장학금은 받을 수 있어서 부친에게 양해를 구하고 입학 허락은 받아냈다. 그와 다시 만난 지 6~7년 만에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고 해방을 맞았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나팔소리 요란해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더니 시작이 있으면 끝날 때도 있었다. 견디기 힘든 시기일수록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지만, 지나고 나서 계산해 보니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었다.
중학교 입학할 때 일차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후, 다시 삼 년이 지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헤어졌으니, 계속 함께 살았던 것은 육 년 남짓한 기간에 불과했다. 내가 장성한 후, 부모님께서 내 집에 기거하시던 때까지 모두 합쳐 봐도 십여 년이 전부다.
일반적인 관례로 재단하면 길었다는 주장이 어색하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동안에 내 인생에서 지대한 영향을 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던 건 부인할 수 없다.
고등학교 3년 동안은 마산에 있는 형님댁에서 기거했는데, 간섭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부모와 형제는 엄연히 다른 존재라, 억압을 받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불편한 게 있었다면, 형님집은 북마산에,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신마산에 있어서 거리가 조금 멀었던 것과 쪼끄마니에게서 이어받은 형님의 짠돌이 습관 때문에 궁핍하게 살았다는 점 정도였는데, 두 가지는 모두 다 오래전부터 익숙했던 일이라 견딜 만했다.
학교 길이 멀어서 이웃에 사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시내버스를 이용했지만, 나는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3년 내내 걸어서 등하교를 해야만 했다.
입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동묘지와 화장터를 지나 재(산고개)를 넘어가는 지름길을 발견한 뒤에는 중학교 때에 비하면 절반 거리 밖에 되지 않았지만, 중간에 양아치들이 많아서 혼자 다니기에는 약간 위험하고 부담스러웠던 점은 있었다.
실랑이가 몇 번 발생한 후에는, 같은 길을 다니던 학생들을 모아 그들과 패싸움을 벌리기도 했는데 곧 평정하여 더 이상의 피해는 당하지 않았는데, 어렸을 때 <쪼끄마니> 덕분에 터득한 싸움기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산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고향에 있을 때와 같이 용돈 같은 건 한 푼도 받지 못했는데, 형님은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았으리라 믿었고, 아버지는 큰 아들에게 맡겼으니 잊고 사셨을 게다. 그로 인해 항상 빈털터리였지만,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어 참고 살았다. 고향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던 시절이라, 방학 때도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대개는 귀향을 피했지만, 보충수업비 교재비 등 내 능력 밖의 잡비가 필요할 때는 잠깐이라도 아버지를 만나지 않을 수는 없었는데, 돈만 받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리곤 했었다.
대부분의 날들을 형님댁에서 기거는 하고 있었지만, 인문계 학교라 자율학습이나 과외수업 등으로 늦게 하교할 때기 잦았는데, 피곤하면 친구들이 자치방이나 하숙집에 끼어 자며 며칠을 보내다가, 오래간만에 귀가를 해도 아무도 이유를 묻거나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전화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연락하는 데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평소에도 과묵하여 보고를 잘하지 않던 내 성격에도 문제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방학 때는 그런 일이 더욱 많았다. 시집간 누님이 여러 명 있었으니 그들의 집으로 갔다고 여겼고, 마산에서는 하동에, 하동에서는 마산에 있다고 믿었을 수도 있다.
덕분에 친구들과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무전여행을 여러 번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럴 때는 무관심이 고맙고 편했다. 나는 절반쯤은 자유인이었다.
<쪼끄마니>와 함께 살지 않았던 그 3년 동안에는, 가능하면 그를 잊고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 남아있는 기억 중에서 그와 관련된 건 거의 없는데, 쓰다 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떠오른다. (먼저 쓴 <에피소드 편>에 포함시키는 게 마땅하지만 이미 지나온 길을 다시 들추기가 싫고. 마침 고등학교 시절을 쓰고 있는 중이며 그때의 얘기라, 생각난 김에 간단히 써서 덧붙이려 한다.)
형님 댁에서 학교를 다니던 2학년 가을쯤의 일이었다. 뭣 때문이었던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형님과 다투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부친께서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가정실습 중이라고 둘러댔다. (당시 시골에서는 농사철에 일을 도우라고 농번기방학을 했고 그걸 그렇게 불렀다. 이 거짓말이 통하지 않고 어색했던 것은 마산은 도시인데 가정실습이란 게 있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아침식사를 마친 부친께서 무조건 자기를 따라오라더니 말없이 앞서 걸어가 마산 가는 기차를 타시기에. ‘들통이 났구나’ 싶어 당황했지만 사족을 달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나를 데리고 당신의 장남(나의 형님) 집에 들어가시더니, 며느리(나의 형수)에게 ‘얘야, 친구 집에 잠시 갔다 오너라.’ 하고 명령하셨다.
그녀가 대문 밖으로 나가자마자, 환갑에 가까운 아버지가 마흔이 다 된 아들을 번쩍 들어 마당에 내동댕이쳐 버리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나버리셨다. 곧바로 하동으로 돌아가셨을 게다. 그날 밤 나는 형님에게 엄청나게 맞았지만 조금도 억울하지는 않았다.
나는 당연히 대학은 법과대학으로 가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친척형처럼 출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환영할 줄로 믿었던 아버지가 그곳으로 진학하면 밤낮으로 데모만 하다가 제명에 못 살 거라며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지만, 데모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나는 ‘아차’ 싶었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그것 때문에 정학을 당했던 적이 있었고, 고등학교 시절에도 비슷한 사건으로 두세 번 봉변은 당했지만 표시 내지 않고 무사히 넘어가서 그분께서는 모르고 계시는 줄 알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마산은 3.15 의거의 자부심과 여파가 그때까지도 남아 있어서, 반정부 분위기가 강했고 데모도 잦았다.)
그래서 엇나가는 소리로 밥도 먹여 주고 등록금도 없는 해양대학으로 진학하겠다고 했더니, 당신도 고민이 되시는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니라 대답이 없는 것을 승낙으로 여겼고, 나의 진로는 그렇게 결정되었다.
입학시험을 쳐서 항해학과에 합격했는데, 자전거 수리를 하더라도 기관학과가 낫다는 의견을 받아들여 전과를 했고, 그걸 전공하고 졸업해 선박기관사가 되었는데, 그게 내 평생의 직업이 되었다.
훗날, 정말로 데모 걱정 때문에 법과대학 진학을 한사코 막았던 거냐고 부친에게 물었더니, 아니면 뭣 때문이었겠냐고 반문하시면서, 언제나 반항적이었던 나의 성질머리와 태도로는 고시에 합격하더라도 출세는커녕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단다.
그러면서 나와 처음 만났던 때의 이야기를 하셨다. 숨이 꼴깍 넘어가면서도 잘못을 시인하고 항복하거나 용서를 비는 꼴을 단 한번도 보지 못했다고 덧붙이셨다.
어린 아들의 이런 반골기질 때문에 사주 보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심지어는 점쟁이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해결책이 없다는 답밖에는 돌아오지 않았다니 겁을 먹을 만했다.
세월을 건너뛰어 나의 대학진학 시점으로 다시 돌아가면, 당시는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므로, 어렸을 때부터 성장과정을 지켜본 분의 걱정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한다 하더라도, 육지보다 바다가 더 안전하다는 주장이 내게는 지나친 비약처럼 느껴졌지만, 쪼끄마니는 다른 의견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바다 위에서 잘못되는 건 운명이고 하늘의 뜻이지만, 땅에서 타인의 손에 목숨을 맡기는 건 훨씬 더 억울하고 위험한 일이라며, 결국은 목숨이 노다지이니 어떤 경우라도 최선을 다해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최종승리자라는 사실을 확실히 기억하라고 강조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