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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5

by 연후 할아버지

2. 쪼끄마니 인생의 초반기



5) 장남의 사고와 그 후의 만주생활


장남을 고향에서 낳은 후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업고 만주로 옮겨 갔는데, 그곳에서 딸을 연이어 두 명 더 낳았다. 어미를 여동생들에게 빼앗긴 장남은 친구가 없고 심심해서 집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숙>으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어린애가 혼자 오가기에는 멀고 험한 길이어서 야단을 쳐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고. 틈만 생기면 탈출을 감행하는 아이를 막을 다른 마땅한 방법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타성만 생겨서, 마침내 집에서 보이지 않으면 학교로 갔거니 학교에서는 집에 있겠거니 짐작하고 방임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말 떼가 아이를 밟고 지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는 급한 연락이 학교로 왔다. 만주에는 수백 마리 말 떼를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목동들이 있었다. 그 말 때에 밟혔으면 이미 끝난 상황이다. 자책을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자전거를 타고 급히 현장으로 가보니, 만주족 청년 한 명이 아이를 안고 넋이 빠져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떨리는 손으로 만져 봤는데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겉옷을 찢어 지혈을 시키고 나서 다시 만져보니 미세하게나마 맥박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데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는 생각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그 청년이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고를 낸 놈인 듯했지만, 탓하는 것보다는 도움을 청하는 게 현명할 것 같아서, 위로의 말을 먼저 건넸다.

"서로 운수가 사나워 발생한 사고였지, 고의가 아니었다는 걸 잘 안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되니, 너무 낙담하지 말고 함께 힘을 합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자."

그 말을 듣고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그 청년이 재빨리 마차를 준비해 와서 모두 함께 타고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는데, 아이는 기적처럼 깨어났다. 그 후에도 일 년 가까이 입원하며 재활의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거의 정상적인 몸으로 회복되었다.


그동안에, 사고를 냈던 사람이 지극정성을 쏟아 준 공로가 가장 컸다. 만주복장을 하고 있어서 처음 만났을 때는 나이가 어리다고 여겼는데 신분증을 확인해 보니 <쪼끄마니>와 동갑내기였다.


청나라 귀족의 후예로 유럽 유학까지 갔다 온 인텔리였는데, 아이의 치료를 위해 함께 동분서주하다 보니, 심성이 착한 진국이라 정도 많이 들어서 서로 의기투합해 흉금을 털어놓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때부터는 토착 만주족들의 도움으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하더니 하는 일마다 잘되었다. 학교는 번창했고 들판을 빌려 농사를 지었더니 계속 풍년이 들었다. 옆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고도 재산은 늘어만 갔지만,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국제정세에 밝은 만주족 친구의 말이니 신뢰할 만한 정보였다.)


그래서 <쪼끄마니>는 그때까지 모은 돈을 들고 큰 형님 준용 씨에게 가서 의논했다.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 땅을 사고 그곳에 터를 잡으라고 권했는데, 준용 씨도 수긍해서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먼저 귀국했다.(나중에 이 부분에서 형제간의 의견이 갈린다. 형은 동생이 경비를 약간 보태줬을 뿐이고, 동생은 분명히 자기 몫의 땅을 사라고 돈을 건넸단다.)


자신의 직계만 데리고 혼자 남은 <쪼끄마니>는, 일본인들의 간섭이 심해 학교는 진작 접어 버렸지만, 만주는 추운 곳이라 철이 일찍 들어 양력 팔월 말이면 추수가 시작되는데 그게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농사 지어 놓은 게 아까워서 그곳에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만주 친구가 뛰어와서 총을 겨누며 비장하게 말했다.

“나는 자네가 다른 사람들의 손에 죽는 꼴은 못 본다. 곡식과 가재도구는 내가 모두 인수할 테니 가족만 데리고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그래서 야반도주하듯이 대충 짐을 꾸려 서둘러 귀국했는데. 고향에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이 패망 소식을 들었다. 며칠만 더 늦었으면 영원히 그곳에 잡혀서 중국의 조선족이 될 뻔했다.


(이건 훨씬 후일의 얘기지만,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직후에 나는 조선족 선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연변으로 출장을 갔다가 <서란현; 지금은 중국발음으로 수란시로 바꿔 부른다고 함>이라는 곳에 우리 종족이 많이 모여 산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지린(길림) 성의 북쪽 끝이라 헤이룽장(흑룡강) 성 하얼빈으로 가는 길목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대도시로 모두 떠나버리고 노인들만 남아 있어서 집단적으로 선원을 얻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이왕 온 김에 부친이 사셨다는 용정이라는 동네도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개발이 되지 않아서 벌판과 산과 거리는 부친에게서 들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다던 노인을 만나 혹시 <쪼끄마니>를 기억하느냐고 묻자, 그가 부친께서 운영하시던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기에, 내가 그의 아들이라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며 부친의 안부를 물었다. 동창생 몇 명도 인근에 살고 있다기에 그들의 스승을 모시고 한 번 더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고 말았다.)


그후 자기 몫의 땅을 구입해 뒀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준용 씨를 만나보니, 만주에서 돈을 맡긴 부분에서부터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먼저 귀국했던 준용 씨는 그동안에 횡천면 학리와 남산리 일대의 들판을 사서 대지주가 되어 있었지만, <쪼끄마니> 몫은 본인의 의사를 몰라 살 수가 없었다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기가 차서, 경비로 보태드리기에는 지나치게 큰 액수가 아니었냐고 항의하자, 약간의 돈은 돌려 주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남은 땅 중에서 혹시 팔려고 나온 게 있으면 사라고 하더란다.(그래서, 가까운 사이나 친인척 간에는 보증을 서거나 금전거래를 하지 말라는 말이 생겨났던가 보다.)


해방이 되자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을뿐더러 팔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만주에서 농사지어놓은 곡식이 아까워 머뭇거리다가 고향에 넓은 땅을 마련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당시에는 아직도 장자우선 제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던 시대였다.

“큰집(장자의 집)이 잘 살아야 가문이 번창한다.”던 윤리가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거나 동조해 줄 사람도 없어서 혼자 속만 끓이다 말았다.


형님이 식솔이 많아서 재산이 필요한 때에 맞춰 목돈이 들어오니 욕심을 과하게 부렸던 거라고 이해는 되었지만, 속이 쓰려서 그 후 한동안은 큰집 근처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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