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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쪼끄마니의 별세와 장례

by 연후 할아버지 Feb 08. 2025

5. 쪼끄마니의 별세와 장례


1) 영원한 이별

 

그 이듬해 가을 어느 날 오전 10시쯤이었다. 내가 타는 배가 인천에 입항을 해서 모처럼 상륙했다가 귀선하려고 집을 막 나서던 참이었는데, 마산 형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부친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이었다. 새벽에 일찍 잠을 깬 아내가 느닷없이 ‘아버님께서 오셨다 가셨다’고 했지만, 오래 뵙지 못해 보고 싶어서 허상을 봤다고 여겼다.


내 집에 함께 살고 계실 때만 해도 강건하셔서 매일 약수터에서 음용수를 몇 말씩 져 나르시던 분이다. 돌아가시기엔 아직은 이른 연세라 갑자기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뒤통수에 벼락을 맞은 느낌이라 다리가 후들거려 똑바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귀국한 후에도 연락조차 하지 않으니 영감님께서 이런 가짜뉴스를 전하게 하신 것 같아서 재차 확인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수화기를 놓은 후 나는 충격을 받아 비틀거렸다. 눈앞은 뿌옇고 온 세상이 투명하게 변했다. 이전에는 내가 그에게 마음속으로 의지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고 애써 부인해 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혼이 빠진 사람처럼 허둥대며 마산 형님댁으로 내려갔다.


쪼끄마니는 주무시는 듯 평안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계셨다. 손으로 만져보니 차가운 몸에서 맥박은 멈췄고, 잠이 들면 유난히 요란하던 코 고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당일 새벽에도 약수터에 가서 물을 두 말이나 지고 오셔서 부엌에 내려놓으신 후, 샤워를 마치고 땀에 젖었던 옷을 갈아입으시고 침대에 드셨고, 평상시의 일과라 주의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단다.


그때마다 당신의 아내인 정우순 여사가 우유를 덥혀서 대령하면 기다리다가 한 잔 마시고 주무셨는데, 그날은 잠이 먼저 드셔서 침대머리 탁자 위에 우유만 놓고 나왔다고 했다.


한참을 지났는데도 인기척이 없어서 다시 들어가 보니 우유가 이미 식어 있어서 다시 데우려고 들고 나오다가,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돌아가 살펴보니 이미 세상을 뜨셨더란다.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무도 임종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의사의 검시를 끝낸 후, 수의로 갈아입히려고 베개 밑을 들췄더니, 유언이 적힌 공책이 나왔다. 학생들 필기용으로 원래는 제법 두꺼운 것이었는데, 몇 번이나 찢고 쓰기를 반복했는지 절반의 부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공무원과 법무사 일을 오래 하셨기 때문에 쪼끄마니는 소문난 달필이셨다. 그런데 공책에 쓰여 있는 필체는 평소에 그가 쓰던 날림체가 아니라 꼭꼭 눌러쓴 정자체라 약간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특유의 말투가 묻어 있어서 그가 정성을 다해 쓴 게 분명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내용을 읽어보니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 공책의 뒤쪽에는 통장과 도장이 붙어 있었는데, 그 총액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드라마에 가끔 등장하는 재벌총수의 유산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적은 액수였지만, 용돈이 부족해서 자주 내게 손을 내밀던 노인의 저축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금액이었는데, 꼼꼼하게 써 내려간 분배해야 할 지급명세를 보며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의 아내 정우순 여사가 여생에 써야 할 용돈과 장례를 치르고 돌아갈 따님들의 여비를 앞쪽에 배정하였고, 손자손녀들의 대학 입학금과 등록금을 대략적으로 추산해 하나하나 거명하머 그다음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런 후에도 남는 돈은 며느리 2명에게 공평하게 나눠줘 간단하게 옷 한 벌씩 사 입고 가족들과 함께 온천이라도 다녀오라는 사족까지 덧붙였다.


당신과 부인이 안식할 묘지는 고향의 뒷산에 마련해 뒀는데, 농사철이나 추수철에는 상여를 메고 올라갈 인부가 부족할 것 같아서 미리 부탁하고 삯까지 지급해 놓으셨단다.


훗날 성묘하러 오는 자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산소 주변에 과수원을 조성해 놓았으니, 가끔 신경 써서 둘러보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는데, 이것은 <쪼끄마니>가 아니라 <오졸정센> 다운 치밀한 준비와 배려였다.


이 세상에 남은 사람들은 장례식에 참석해 상여를 따라가며 곡을 하는 것 외에 할 일이 없었다, 사후까지 이렇듯 완벽하게 준비해 놓으시려면 뭣 때문에 자녀들은 여러 명이나 낳고 기르셨습니까?


2)  장례식그 후


고향에 가서도 과연 모든 게, 당신께서 예측하셨던 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추수철이라 상여꾼과 인부걱정을 하며 갔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농사일을 접고 나와 떠나시는 걸 슬퍼하며 상여 메는 일과 하관작업을 함께 해 줬다.


양지바른 언덕에 미리 조성해 놓은 묘지 주변의 풍경은 부잣집 정원이나 풍치 좋은 공원과 흡사했는데, 묘의 뚜껑을 열고 관만 묻으면 작업이 끝날 수 있도록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 나의 귀에는 “소인의 죽음을 슬퍼할 사람은 가족과 자손 밖에는 없다.”던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주장을 그대로 적용해 보더라도, 고향의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으며 떠나고 있는 나의 부친 쪼끄마니가 소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상여를 뒤따르며 곡을 하는 자손들과 친척들의 숫자나 운구행렬과 지인들의 줄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많고 길어서, 조문객들의 숫자나 장례식의 규모만을 놓고 본다면, 대인이었다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더라도 대인과 소인의 중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누구보다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쪼끄마니 일생을 정리해 둬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굳혔고 가능하면 세상에 알리고도 싶었지만, 이념이 판치고, 영웅만을 숭상하는 시대 조류와는 거리가 먼 분이라 세인의 관심을 끌만한 요소가 드물다는 염려는 있었다.


또한, 그의 임종과 장례 부분을 회억해 보면 언제나 약간의 찜찜함이 남았던 것도 문제였다. 지나치게 완벽해서 기획되고 조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평생 동안 가장 존경하셨다던 당신의 할아버지(나의 증조부)의 사망 원인에 대해 어린 시절 내가 의심을 품었을 때와 비슷한 냄새가 나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득을 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타살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한 정도일 텐데 그것을 증명할 방법마저 없었다. 만약에 나의 추리가 맞고 사실이라 한들 그걸 밝힌다고 뭣이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나의 내부에서 계속되었던 의심이 그에 관한 글을 쓰는 데 방해되었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으니 이런저런 핑계도 많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긴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내가 그분께서 세상을 떠났던 나이와 비슷한 늙은이가 되어 버렸다.


여기서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미국 대통령이던 바이든이 자신은 나이가 마흔쯤 된 걸로 여기고 살고 있는데 사백 살로 부풀려 선전하는 바람에 재선의 꿈을 접었다던 나이에 곧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봤다. 세기적인 대작을 만들거나 노벨상을 받을 일도 없는데 독자가 없으면 어떠랴? 인연이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나타나 삶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다면,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달려와 종착역에 가까이 왔다. 


내용만 제대로 전달하면 되니 글의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뒤범벅이 되어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몹시 우울하다.


사실 그동안 나는 어릴 때 학교에서 받은 숙제를 하지 못한 아이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왔는데, 오랜 체증이 사라진 것처럼 상쾌하고, 가슴 복판에 박혀있던 돌덩이들이 빠져나간 듯이 후련하다. 


고백성사 의식도 마쳤으니 이제는 그분을 자유롭게 떠나보내 드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십자가를 혼자서 지고 사시던 영감님, 이제는 기억에서도 지우고 영원히 해방시켜 드릴 테니 근심걱정일랑 모두 잊어버리고 훨훨 날아가 편안히 쉬소서.  




사족 1) 부친의 장례식 때, 내 여자형제들 중에 유산분배에 대해서 뒤에서 숙덕이는 분들이 보여서, 내가 앞에 나서며 큰 소리로 ‘나도 모든 권리를 포기할 테니 출가외인들은 입을 닫으라.’고 호통을 쳤고, 그게 먹혀들어갔는지 조용해졌다.


부친의 성격상 대부분의 재산을 미리 증여해서 남은 게 많지는 않았겠지만, 형님은 당시의 내 선언을 빌미로 모든 유산을 독차지했고 끝까지 나에게는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잔돈푼에 연연할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았으니 탐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상의를 하거나 입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무시를 당한 것 같아 수긍을 하거나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자기 집을 증개축하면서 부친을 통해 빌려갔던 돈도 한 푼도 갚지 않았고, 심지어는 손주들의 학비라고 내 아들들에게 남겨줬던 돈마저 세월이 지나자 까마귀 고기를 먹어 버렸다. 


(부친을 핑계 대며 자신은 그분께 다 드렸고 남은 게 없다고 주장하니, 이런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신용거래를 하도록 방치했던 내 잘못이 크고, 형제간에 송사를 벌릴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일찍부터 포기해 버렸다. 그런 와중에 내 아이들의 등록금마저 사라졌는데, 이는 다음 세대에게도 실수한 형님의 잘못된 처신이었다.)  


나는 남자라서 잊고 살지만, 내 아내는 그런 일들이 마냥 억울하고 섭섭했는지 두고두고 되뇐다. 그녀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으니 부인할 수도 없고 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피하다 보니 그것도 앙금으로 쌓여 큰집과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게 안타깝다. 


내가 부친의 일생을 쓴 까닭 중에는, 더 오랜 옛날 쪼끄마니가 만주에서 귀국했을 때 그의 백형 준용 씨가 했던 행위처럼. 그 시절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현행법과는 무관한) 장남우선주의의 전통이 배어 있었음을 설명해 주고 싶은 마음도 섞여 있었다. 


중간에서 내가 해결하고 풀어줘야 했던 문제지만, 이런 일들이 성격에도 맞지 않고, 성가시게 느껴져 방치했다가 기회를 놓쳐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었다.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원래부터 내 형님께서 탐욕이 심한 분임은 인정하지만, 이제는 모두 다 나이가 들었으니 내 아내가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해 주길 바란다.


사족 2) 시작할 때는 부친의 일대기를 써보려 했는데 끝나고 다시 읽어보니, 나의 어린 시절 얘기가 너무 많이 섞여 있어서 부친을 빙자하여 자신의 회고록을 썼다고 의심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이 나이에 내가, 정치를 하거나 연예인이 될 의도도 전혀 없는데, 스스로 벌거벗겨지는 걸 원하거나 진실을 부풀려서 자신을 부각해야 할 까닭이 없잖은가?  만약에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 부친에 관해 열심히 표현하려다가 능력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실수였다고 해명하고 싶다. 


또한, 쪼끄마니 영감님의 유언 공책이 생각나 묘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가족들이 읽으면 나의 상태를 염려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데, 나는 아직도 영육이 모두 정상이고 건강하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하고 싶다. 


하늘이 데려가려 작정했다면 오래전부터 수많은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살려놓으신 건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남았으니 마저 끝내고 오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환언하면, 뭔가 하고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서 떠나갈 생각도 없고, 당분간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확고히 믿고 있으니, 이 글들을 그 유언과 결부시켜 불길한 상상을 할 이유나 필요는 조금도 없다는 뜻이다.


후기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데, 많이 어수선하긴 했지만 나의 부친 쪼끄마니에 대한 나의 기억들 중에서 생각나는 건 거의 다 쓴 것 같으니, 일단 이 글은 여기서 멈추려 한다. 


그중에서 영양가 있는 게 얼마나 될지 모르지만, 보물찾기는 독자들의 몫이다. 백 년도 훨씬 넘는 세월 전에 이 땅에 태어나 먼저 살다 가신 어떤 분의 인생과 흔적들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면 필자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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