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용 씨가 7~8세 되었을 때 부친 택기 씨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남(기용 씨의 큰 형님) 준용 씨, 차남 경용 씨와 장녀 순심 씨는 결혼하여 손주들(기용 씨의 조카들)이 여러 명 태어나 있는 상태였다.
가장의 책임은 자연스럽게 준용 씨가 이어받았는데, 허울만 좋은 양반집일 뿐 살림살이는 풍족하지 않아서, 끼니를 거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보릿고개에는 양식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궁색했다고 한다.
다산의 피는 준용 씨와 경용 씨에게도 유전되어 경쟁적으로 기용 씨의 조카들이 태어났고 식구는 계속 늘어났는데, 과년한 누이동생들은 시집을 보내야 했다.(겉치레와 체면을 중요하게 여기던 사람들이라, 빚을 내더라도 허술하게 결혼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셋째 삼용 씨는 인근에 소문난 천재라 종친들이 돈을 모아 줘서 일본 유학까지 갔지만, 둘째, 넷째, 다섯째(기용 씨)와 막내는 학교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해. 기용 씨는 열두 살이 되도록 머슴들과 함께 농사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런데 준용 씨의 아들들이 취학연령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학교는 먼데 도중에 불량아들이 많아서 보호자가 필요하게 되었고 적임자는 기용 씨뿐이었다. 덕분에 그는 막내동생 그리고 조카 두 명과 함께 모두 같은 학년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등하교 길에서나 학교에서나 그는 당연한 우두머리였다. 또래에서도 힘과 주먹이 센 소년이었는데 나이도 대여섯 살 위였으니 아무도 덤빌 엄두도 내지 못했다.
4~5년이 더 흘러 고학년이 되자 조숙했던 그는 벌써 청년티가 났고, 운동에는 만능이었다. 5학년 때 성인들을 포함한 군민체육대회에 마라톤 선수로 참가해서 우승을 했고, 6학년 때는 씨름대회에서 나가 장사가 되고 황소를 땄다. (실제로는 송아지 꼴을 막 벗어난 중간 크기의 소였다는데, 가세가 풍족하지 않았던 준용 씨도 이 때는 기분이 좋았던지 그걸 잡아 마을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일본은 식민지 백성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스포츠 장려 정책을 썼는데, 쪼끄마니가 지방대회에서 마라톤 우승을 한 지 4~5년 후, 동갑내기 손기정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것도 이런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순 씨가 그에게 반한 것도 그가 건장하고 탁월한 운동선수였기 때문이었는데, 섬진강 건너 전라도 광양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그때는 물건을 사러 하동장터에 모여들었고, 하동으로 학교를 다니기도 했단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중간지점이었던 하동은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인근 고을들의 중심 역할을 했는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지로 변했다. 지금은 인구도 많이 줄어 주변에 있는 광양, 남해, 사천 등에 비해 세력이 가장 약한 고을이 되어 버렸다.)
우순 씨는 광양군에 속한 섬진강 저편 마을에서 자란 부유한 농가의 장녀였는데, 그녀에게는 여동생들만 있었던 게 아니고 근호라는 이름을 가진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기용 씨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함께 구경 나왔던 누이가 바람이 들었다.
그는 몇 년 후 태평양 전쟁 때, 징용을 당해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했지만, 인연이 맺어지려고 그랬는지 나중에 쪼끄마니도 평생 만났던 수많은 청년들 중에 그보다 잘생긴 이를 본 적이 없다는 말로 그를 회억하곤 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나의 장남이 태어났을 때, <쪼끄마니>는 그 손자이름에 자기 처남의 <근> 자를 붙였다.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승선 중에 이미 출생신고를 해 버렸고, 작명은 전통적으로 조부 소관이라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너무나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이었음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