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정씨는, 고려말의 격동기에 충절을 지키다 살해당했지만 그를 죽인 자들에게 만고충신으로 추앙받는 이변의 주인공 <포은 정몽주 선생>을 중간 시조로 모시고 사는 씨족 집단이다. 그분의 고향이 포항 근처의 영일만이었기 때문에 영일정씨라 칭하기도 한다.
고려수도였던 개경에 있는 선죽교에서 피습당해 돌아가셨으니, 무덤은 북한의 개성이나 포항에 있을 것 같지만 엉뚱하게도 경기도 용인에 있는데, 운구를 하던 도중에 상여가 멈춰서 꿈쩍도 하지 않아서 오랜 친구였던 이성계가 직접 와 용서를 구하고 그 근처에 묘를 썼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의 태조와 포은은 친구사이가 아니라 정적에 가까웠는데, 전자가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후자가 정 씨 왕조를 열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고 들었다.
역성혁명과 조선의 건국을 반대했기 때문에, 태조의 아들로 나중에 태종이 된 이방원이 암살자를 동원해 그를 선죽교에서 피살하고 역적의 누명을 씌웠다가, 왕자의 난 때 삼봉(정도전)을 처형한 후 이완되었던 민심을 돌리기 위해, 죽은 사람을 역적에서 충신으로 복권해 다시 받들게 했다는 건, 아이러니한 사실이지만 다수가 인정하는 국사의 정설이다.
어떤 일도 햇볕을 쪼여야 정사가 되고 달빛 속에 숨어 있으면 야사로 변한다고 하지 않던가? 역사란 어차피 승자의 기록일 뿐이므로 진실이 무엇이었는지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 가정법을 동원한 호사가들의 입방아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조상들의 악연으로 인해, 포은의 자손들은 이씨조선이 끝날 때까지, 양반계급을 유지하기 위한 진사시험에만 합격하고 과거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음으로써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다는데, 이 또한 자발적인 행위였는지 왕조에서 위험한 핏줄들의 등용을 회피하였기 때문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그들은 중앙으로 진출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이 되어 조상 이름을 팔아 자존심을 세우고 살았는데, 그들 중에는 유학자로서 이름을 날린 사람도 간혹 있어서 그들을 중간 시조로 모시고 사는 지파들도 생겨났다.
산청지방의 <설곡파>나 거기서 떨어져 나온 하동의 <도암파>도 모두 그런 아류였던 것 같은데, 나의 조부 택기 씨는 도암파의 대종손이었다고 한다.
그의 모친(나의 증조모)이 산후병으로 일찍 세상을 하직한 후 계모 등살을 견디지 못해 종중집과 제각도 빼앗기고 이웃마을로 이사를 가서 새로운 생활터전을 마련한 약간 특이한 사정은 있었다.
(제각은 양보면에 있었고, 택기 씨가 이사 간 곳은 고전면이었는데, 기용 씨가 나고 자란 건 섬진강가의 적량면 고절리란 곳이었다. 마지막에 정착한 횡천면 학리에서 양보면까지는 평지로 둘러 가면 상당히 거리가 멀었는데 마을 뒤에 있는 고개만 넘으면 되어서 행정구역은 복잡했지만 부처님 손바닥 안처럼 붙어있던 곳들이었다. 그래서 성묘를 가거나 제각에 갈 때는 항상 재를 넘어가곤 했다.)
우리의 기용 씨는 택기 씨의 여섯 아들 중에 다섯째(아홉 자녀 중에서는 일곱째)로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에 태어났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예고하듯 그해에는 전 세계에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서양에서는 그 유명한 타이타닉호가 대서양 한가운데서 좌초되었고, 레닌이 모스크바로 들어가 공산당을 창설했다. 청나라가 망한 후 손문(쑨웬)이 중화민국을 선포했고 일본에서는 명치(메이지)가 죽고 대정(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여 다이쇼 원년을 선포했던 게 모두 그해에 일어났던 일이다.
국내에서는 베를린 올림픽(1936년)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북한의 김일성이 같은 해에 태어난 그의 동갑내기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최근까지도 그해를 주체원년으로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조상들 덕분에 세습집권을 할 때는 백두혈통을 입에 살던 개막난이 손자 놈이 최근에는 조상들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그 연호를 폐지했다는 소식도 들렸는데, 진위 여부는 아직 모르겠다.)
한국 현대 불교계에서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성철 스님께서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나서 그가 세상을 떠났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입적하셨던 것도 보이지 않는 인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러고 보니 하동과 산청, 고향도 바로 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