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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푸른 시절 01화

머리말. 내 아들들에게

by 연후 할아버지

머리말. 내 아들들에게


이번에 내가 다시 승선을 하겠다고 했더니 자네들은 모두 죄송하다며 눈물을 흘리더구나. 이 나이에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줄 알고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짐작되는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으니 자책하거나 법석을 떨 일은 아니었다.


너희들 할아버지의 일생을 글로 표현해 보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지만 바쁜 업무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다가, 퇴직 후 출근하지 않게 되자 시도해 봤는데, 산만해서 집중하기가 쉽지 않더구나. 그래서 차라리 승선을 하면서 계속하는 게 어떻겠나 싶어서 환경을 바꿔 본 것뿐이다.


요즘은 선박 일도 만만한 게 아닌데 사이사이에 짬을 내서 다른 일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단조로운 생활이라 신경 쓸 것도 많지 않을뿐더러, 평생 익숙했던 일이라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나를 고용한 해운회사에서 이 사실을 알면 좋아할 까닭이 없고, 흉보기 좋아하는 세상에 스스로를 노출시켜 번거로움을 자초할 이유가 없어 조심하고는 있다만. 업무가 끝난 후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니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 할 일도 아니다.


역시 내 판단이 옳았다. 인터넷 연결이 자주 끊어져 자료를 찾아보기가 어려워 기억에만 의존하는 불편함은 감수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집에서는 그렇게 나아가지 않던 진도가 여기로 옮겨 오고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빨리 끝나 버리고 말았다.


세월도 길고 사건들이 많아서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실제로 써 보니 할 말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미심쩍은 상황을 만났을 때 주변에 찾아볼 자료가 없으니 대강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시간을 단축시킨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서로 떨어져 산 세월이 길었기 때문인지, 너희들이 자라나던 모습을 회억해 보면 계속 연결되는 게 아니라 잘라진 필름을 이어 붙인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았는데, 내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자네들의 아비에 대한 기억도 그럴 것 같아 항상 미안했다.


그래서 이왕 시작했고 시간적 여유가 생긴 김에 내가 살아왔던 얘기들을 약간씩만 더 덧붙여 퍼즐을 맞춰 놓으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저네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들은 할아버지의 생애를 쓰며 대강 곁들인 것 같고, 내 나이 30대 이후는 함께 겪어 온 일들이며 이미 대강은 알고 있는 것들이라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는 않을 것 같은데, 중간에 끼어 있는 20대 초중반의 일들만 빠졌더구나.


그 부분들만 써서 보충하려다 생각해 보니, 그대들의 나이가 이미 그 시절의 나보다 훨씬 더 많아 참고가 될 만한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아 망설여진다.


자네들의 아이들(내 손자들)에게는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합리화시켜 보지만, 시대상황이 변했고 많은 게 당시와는 너무나 달라져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아무도 관심을 갖고 읽어 주지 않더라도, 부친이 <쪼끄마니>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때처럼 내게는 가장 싱그럽고 푸르던 시절의 기억들이라, 한 번은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갖고 있기는 했지만, 마땅히 실행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모처럼 의욕이 생겼을 때 일단은 정리해 놓기로 작정했는데, 자네들이 자신들의 그 시기와 비교하며 읽어 주면 좋겠지만, 아니라고 판단되면, 내 손주들에게 동화책처럼 전해 줘도 된다.


먼저 쓴 글도, 시작할 때는 내 부친의 얘기와 관련된 내 인생의 초창기만 약간 들춰 보려 했지만, 쓰다 보니 기억이 엉켜서 시점의 구별이 애매한 곳이 많았는데, 이번에도 혹시 이미 알고 있고 중첩된 부분이 발견되더라도 늙은이의 지력이 떨어졌다고 여기고 작은 건 눈감아 주기 바란다.


아직까지는 지나온 과거의 일들은 비교적 생생하지만 누구에게 어디까지 얘기했는지는 분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냥 일반적인 노화 현상이고 치매의 전단계는 아니어야 할 텐데, 약간 두렵기도 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가능하면 메모를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젊었을 때부터 계속된 습관 때문인지 다시 읽어보고 확인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시간만 낭비하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다 보니 내 부친의 유언 공책이 생각나 기분이 묘한데, 나는 그분처럼 치밀하지 못해서 노후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유산으로 넘겨 줄 재산도 거의 없으니, 이런 글이라도 남겨 놓으면 조금이라도 오래 기억해 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나머지 일은 하늘에 맡기고 일단 써 놓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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