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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헤미안 04화

4. 일본 친구 ‘아오끼’

by 연후 할아버지

4. 일본 친구 ‘아오끼’


<아오끼>는 나와 젊었을 때 만나 지금까지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오래된 친구다. 동경 상선 대학을 졸업한 엔지니어인데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중견 기관장이었고 그는 그 회사의 초보 공무 감독이었다.


<코에츠너>처럼 흉허물 없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변함없는 관계가 유지되었던 건 이웃나라에 살면서 유관 직업을 갖고 있어서 서로 정보 교환이 필요했고 마주치는 기회도 잦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멀리 떨어진 바다만 항해하며 귀향하지도 못하는 생활이 지겨워서, 몇 개월에 한 번은 부산에 귀항한다는 국내 대리점의 꾐에 빠져 일본 국적의 자동차 운반선으로 옮겨 탔는데, 고베 항에서 승선 직후에 만난 사람이 바로 <아오끼>였다.


인수인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원숭이처럼 생긴 놈이 나타나서 시건방을 떨었다.

“어이, 기관쬬(기관장), 너 엔진바리끼(기관 마력) 계산할 줄 아나?”

아무리 바빠도 이런 꼴을 보고 그냥 지나갈 정도로 내 성질이 좋지 못했다.

“봐라, 내가 여기 실습하러 왔나? 니 방금 뭐라 캤노?”

“그저 물어봤다. 공무 감독이 기관장에게 질문도 못하나?”

“잠깐만 기다려라. 거룩하신 공무 감독 놈아.”


하던 일을 멈추고 메인 엔진 운항 지침서(Instruction book)를 찾아서 그에게 던졌다. 서로 운이 나빴던지 험한 말이 오고 간 직후라 감정이 실려 있었던지 모르지만 그 책이 날아가 그의 얼굴을 정통으로 때려 버리고 말았다. 코가 깨지고 피가 터졌다. 그보다는 내가 더 당황했지만 이미 넘어진 물병이었다.


그는 놀라서 도망을 쳤고 나는 승선할 때 들고 간 가방도 풀지 않은 상태로 분을 삭이고 있었지만, 시간이 되자 그 상태로 출항을 했고 싱가포르까지 항해했다.


그러는 동안에 한국 대리점에서 몇 번이나 연락이 오고 경과를 물었지만 나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선할 각오를 했지만 교대자가 오지 않으니, 가방을 다시 풀고 항해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배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일본이나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사 개월이 소모되었는데, 그동안 내내 그 사고는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나는 침울하게 지냈다.




다음번에는 요코하마에 입항했는데, 여기서 절반을 싣고 부산을 거쳐 또다시 유럽과 미국으로 갈 계획이랬다. 부산에 가면 무조건 하선하려고 작정하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접안하자마자 원숭이 녀석이 승선해 곧바로 내방으로 올라왔다.


아는 척도 하지 않았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해 또 한 번 사람을 놀라게 했다. 후임자를 구하지 못해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닌데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맞을 짓을 했더란다. 이런 미친놈을 어떻게 대해야 하나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변명하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은 그때 내가 너를 때리려 했던 게 아니고 책을 건네주려던 게 이상하게 꼬였다.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다.”

그렇게 우리는 화해를 했고 친구가 되었다.


부산에 들렀을 때 대리점이 와서 얘기했다. 일본 선주가 사건 발생 직후에는 당장 교대를 시키라고 난리를 피웠는데, “해양 대학을 수석 졸업한 인재였고 충분한 경력을 갖춘 사람인데 그렇게 대우한 너희들의 책임이다” 하며 버텼고, 시일이 경과하자 조용해져서 유야무야 넘어가는 걸로 여기고 있었단다.

“그 사람이 동경 상선 대학 출신이랬지? 아무래도 해양 대학 수석 졸업했다는 거짓말이 먹혀 들어갔던 것 같네.”

우리도 웃고 말았다. 후일 내가 <아오끼>에게 지나가는 말로 슬쩍 찔러본 적이 있었다.

“이 순진한 친구야, 내가 해양 대학 수석 졸업했다는 거짓말을 그렇게 쉽게 믿었더나?”

“그런 조사도 안 했겠나? 한 항차 동안 업무 처리 능력을 봤던 거지.”

요즘도 내가 귀국하면 가끔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

“이번에도 조사해 보고 전화하나?”

“당연하지. 내가 귀신이가? 그러지 않으면 자네 귀국한 걸 어떻게 알았겠나?”




<아오끼>와 나의 관계가 오래 유지되었던 건 그의 철저한 다데마에(建前) 처세법 덕분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본인들은 흔히 회자되는 두 가지 진실, <혼네(本音;본마음)>과 <다데마에(建前; 꾸민 행동)>가 둘 다 옳다고 교육받으며 자란다. 흑백론에 익숙한 우리는 이중 잣대라고 비난하고 꺼리는 일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관계는 단절되지 않는 마법 비슷한 게 있었다.


또한 일본인들은 대개, 이유는 잘 설명하지 않는 편이지만, 뒷담화를 하는 일도 드물다. <왜냐하면>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사전을 뒤져보니 <나제나라>라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평상시에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다. (<그러므로>라는 뜻의 <다까라>가 있지만 그건 결론을 내리는 것이지 설명을 위한 게 아니므로 의미가 약간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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