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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헤미안 03화

3. 독일 선장 ‘코렐’과 공무 감독 ‘한스 코에츠너’

by 연후 할아버지

3. 독일 선장 ‘코렐’과

공무 감독 ‘한스 코에츠너’


처음 만났을 때, 독일인들은 대부분이 배타적이고 날카롭고 무뚝뚝하지만, 섬나라가 아니라 대륙적인 기질 때문인지 세월이 흐르면서 정이 들면 좋은 관계가 오래 지속된다. (앞쪽은 어릴 때부터 세뇌된 히틀러의 이미지 때문에 남은 잔상일 수도 있고, 뒤쪽은 내가 친한 소수를 보고 전체를 평가한 개인적인 편견일 수도 있다.)


<코렐> 선장은 전형적인 독일인이었다. 그분과 함께 승선했을 때는 내 아내가 나와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자기 딸이라 부르며 무척 예뻐하셨다. 그래서 더 정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노인처럼 행세해서 그렇다고 여겼더니 독일이 패전할 때(1945년) 초등학교 5학년이었단다. 역산을 해보니, 나보다 20년쯤 위였으므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고생을 많이 해서 그렇게 늙어 보였던 것 같다.


배가 고파 남의 감자밭을 뒤지던 일이며, 학교는 가지 않고 뱀장어를 잡던 얘기들은 내 어릴 때와 비슷해서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 많았지만, 나는 심심해서 벌린 장난이었는데 그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어서, 절박함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동생 둘(남자와 여자 각 1명)을 기르느라 학교 공부는 일찍 포기해 버렸고, 동생들이 어렸을 때는 먹고 자는 걱정만 하면 됐지만, 그들이 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학비가 필요해서 조선소로 가 막일을 하다가, 그 수입으로는 부족해서 선원으로 전직했다고 한다. (틈만 나면 추운 겨울날 동생들을 보살피던 일들과 조선소에서 고생하던 얘기들을 반복해서, 그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나의 독일어 듣는 능력을 많이 향상시켜 줬다.)


배를 타 보니 사관이 되면 봉급이 훨씬 많지만. 면허장이 따야 가능한 일이한 걸 알게 되었는데,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지만 동생들의 미래를 생각하니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학교를 다시 갈 형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독학으로 터득할 수밖에 없었는데, 동승한 나이 어린 항해사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다행히 그들이 전격적인 응원과 도움을 줬다.


몇 번을 낙방하며 고생했지만 마침내 면허 시험에 합격했고, 그 일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자랑스러웠던지, 택시 두 대를 빌려 한 대는 면허장을 태우고 다른 차에는 자신이 타고 금의환향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들으며 나는, 양친의 보호 아래 자랐고 승선한 후에도 좋은 시대를 만나 편하게 지냈다 싶어서 부모님을 원망하던 마음을 버리고 감사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 몸부림친 덕분에 남동생은 좋은 교육을 받고 큰 은행에 입사해 부총재로 진급했고, 여동생은 전문의 면허를 가진 대학교수가 되었는데, 그가 유럽 항구에 입항할 때마다 동생들이 와서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 뒀다. (우리 부부도 그를 따라가서 비싼 음식을 맛보는 호사를 자주 누리곤 했다.)




<한스 코에츠너>는 나와 동갑내기 공무 감독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일 때문에 여러 번 다퉜다. 어렸을 때는 싸우면서 크고 정든다더니 만난 지 3년쯤 되었을 때는 가까운 친구로 변해 있었다.


하루는 그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만난 지 오래되었으니 서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친구가 아닌 가족으로 지내자.’ 나쁜 제안은 아니어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어서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코에츠너>라고 부르지 말고 <한스>라고 불러라. 내 부모님께도 그렇게 전했으니 시간을 내어 인사드리러 우리 집으로 가자,’ 그냥 하는 얘긴 줄 알았더니 이건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 비슷한 걸 하자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유일한 형제가 되었고, 생일이 며칠 빠른 그가 형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때도 관계는 지속되어 그의 가족이 내 집으로 온 적도 몇 번 있었고, 내가 독일 근처로 출장을 갈 때면 그의 집에 머물곤 했다.


환갑쯤 되었을 때, 정년퇴직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가 사고를 당했고 나는 평생의 지기를 잃었다.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가족과 자녀를 내가 당연히 잘 보살펴 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점에 대해 나는 항상 미안한 생각을 품고 산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는 나처럼 몰인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코렐> 선장과 동승하고 <코에츠너>가 그 배의 공무 감독을 하고 있을 때, 뮌헨공항에서 엽기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나 연일 해외 토픽을 장식했던 기억이 난다.


터키 국적의 노인이 사람의 머리를 잘라 싸 들고 비행기를 타려다 발각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 연일 해외 토픽을 장식했는데, 피해자가 범인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세상을 더욱 경악시켰다.


내용을 요약해 보면, 노인은 그 딸이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부유한 친구에게 첩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녀가 원하자 약혼자가 학비를 대며 독일로 유학을 시켰는데, 공부가 끝난 후 귀국을 거부하자 여자의 부친이 개입하면서 이런 사고로 이어졌다.


유럽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볼 때도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중범죄였지만, 터키인들이 볼 때는 약속을 지키기 위한 명예로운 선택이었다. (범죄자 인도 협정을 맺고 있던 두 나라가 외교적으로 시끄럽다는 얘기만 듣고 결과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당시는 서독 시민권자의 2할 이상이 터키계였는데 점점 더 불어나 독일인들이 골치를 썩고 있을 때였다, 다른 나라 이민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대부분은 융화되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데 비해 터키인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들의 문화와 전통을 간직한 채 독일 시민권을 가진 외국인으로 남아 있는 게 문제였다.

더구나, 독일인들의 출생률은 자꾸만 떨어지는데 터키인들은 생기는 데로 아이를 낳아서 세월이 가면 인구의 역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위기감도 팽배했다.


어떤 사람들은 세계대전 전의 유태인들도 이들과 비슷했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유대인들은 부자였고 터키계는 가난한 것 밖에 없다고 막말을 하기도 했다.


독일계는 월급이 적다고 기피하는 하위 공무원이나 경찰직은 대부분이 터키계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행하는 역차별도 상당해 그것을 지적하며 분통을 터뜨리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문화적 갈등과 위기의식이 동독과 통일을 할 수밖에 없던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니 이것도 주님의 작업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내 경험으로는 그분은 전술보다는 전략에 강한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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