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칭다오(靑島)항에 입항할 때 회사에 급하게 연락할 일이 생겨서 브리지(船橋)에 올라갔더니 머리가 하연
도선사가 선원 명부를 보다가 내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선원 명부의 생년월일이 맞습니까?’하고 묻는다. ‘왜 그러시오?’ 하고 되물었더니, 내 이름의 식(識) 자를 짚으며 ‘이 글자도 맞습니까?’ 하는 엉뚱한 질문을 연이어한다.
“속고만 살았나? 이름과 생년월일이 엉터리면 승선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아실 텐데.”
“신기해서 그럽니다. 오래전 우리 교수님 함자와 같고 명부상 생년월일은 비슷한데, 저보다 더 젊어 보여서.”
“사람을 잘못 본 게지요. 나는 당신 같은 제자를 둔 적이 없소.”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내 팔을 붙들며 말했다.
“당연히 모르시겠지요. 짧은 기간이었고 제가 우수한 학생도 아니었으니, 대련 해사 대학을 기억하십니까?”
“생각나긴 하오만.”
그때는 나도 어렸고 그 학교도 초창기였다. 중국에 정착할 수 있을지 가능성 여부를 타진해 보려고 그곳으로 갔더니, 실력 검증 겸해서 특강을 해 보라기에 몇 번 강의를 했던 적은 있었다.
항해과 학생들에게 ‘기관개론’을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니 이 도선사는 그때의 학생이었을 확률이 높은데, 나는 잠시 항해과 강의를 하다 끝냈지만, 그들은 내가 기관을 전공한 사람이니 그쪽 교수로는 상당 기간 근무했다고 착각했을 수는 있겠다. 그렇더라도 짧았던 만남의 기억을 이렇게 오랫동안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는 건 기적이나 초능력으로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당시에 그 대학은 시작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이 빈곤에 허덕일 때라 지망생들이 많아서 베이징(北京) 대나 칭화(淸華) 대학보다 입학이 더 어렵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영재들이 우글거렸다.
중국 특유의 인해전술로 학년마다 <항해과>와 <기관과> 학생들을 대규모로 뽑아, 각 학과는 8반씩 도합 16개 반을 운영했다. 4개 반은 중국어로 나머지 4개 반은 교재와 강의를 영어로 진행했는데 중국어가 능숙하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영어 팀에 속했다.
내가 졸업한 한국 해양대학교보다 학생 수는 4배 이상 많았던 셈인데, 경험 있는 교수 요원이 부족해 여러 경로를 통해 대대적인 모집을 하곤 했다. 우수한 학생들은 많이 확보해 놨는데 교육할 자료나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배우려는 열의는 대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실에 들어가 보면 언제나, 우수한 두뇌를 가진 학생들의 호기심과 기대에 부푼 눈망울만 가득 차 있었지만, 가르칠 사람이 없어서 휴강이 잦았다. 당시의 중국은 외부 강사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 어렵게 섭외한 교수들도 오래 지킬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중의 하나였던 나도, 월급이 적어서 가족과 함께 이주할 환경이 아니라 판단하고 일찍 포기하고 도망치듯 철수하고 말았지만, 당시 학생들의 배우려던 열망을 회상해 보니 중국이 그렇게 빠른 성장을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던 나라가 요즘은 외화가 넘쳐서, 다른 나라의 전문직들을 돈으로 유혹해 빼 간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뿌리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회억과 상념에 잠겼다가 깨어나 다시 물었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 어떻게 아직까지 기억을 할 수 있었소?”
“중국인들에게는 찾을 수 없던 독특한 미소와 <지식>이라고 할 때의 <식(識)>자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름으로는 자주 사용하지 않는 글자거든요.”
그러고 보니 한국에서도 한글로는 동명이인이 많았지만, 한자로 그 글자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있다 한들 평생 사용한 이름을 이 나이가 되어 바꿀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모르는 게 약이다 싶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그 학교는 건재하오? 당시에 내가 만났던 분들은 오래전에 모두 은퇴했을 것 같지만.”
“저희도 은퇴 직전입니다. 그런데 대단하시네요. 아직도 건강하게 일을 하시고.”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능력이 부족하면 건강하기라도 해야지요.”
내 이름에 그런 글자를 붙인 건, 확실하지는 않지만 부친이셨을 것이다, 아무튼 특이한 취향과 감각을 지녔던 분은 분명하다. 낳았을 때 소망이 그랬다면 끝까지 소신을 지켜 학자로 키우시지 중간에 왜 목표를 바꿨던 것일까? 여러 가지 상념 속에 보낸 머리가 복잡한 하루였다.
이튿날 아침, 그 도선사에게서 ‘동창들끼리 정기적인 모임이 있으니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전갈이 왔다. ‘자기들의 모임에 나를 끌어들여 어쩌겠다는 거야. 서로 어색할 것만 같은데.’ 툴툴대면서도 그렇게 하겠다는 답을 보냈더니 시간에 맞춰 택시가 왔다.
거창한 식당이었다. 그런데 그 입구에 ‘환영합니다. 은사님’이라 쓴 현수막이 걸려 있어서 쑥스러웠다. ‘며칠이나 배웠다고 은사님이래?’ 돌아갈 수도 없어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박수 소리가 요란했다.
“반갑습니다, 함께 늙어 가는 마당에 친구라면 모를까 은사란 표현은 과분합니다. 아무튼 잊지 않고 이렇게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긴 합니다. 복 듬뿍 받으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간단한 답례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방에서 술을 권해 오랜만에 만취해서 벽에 기대앉아 잠깐 졸았던 것 같다. 저희들끼리 하는 말을 들으니, 그렇게 인기 있던 학교에 지원자가 없어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 생겼단다.
<한 자녀 갖기 정책>의 결과물이란다. 결혼 적령기의 남녀 성비가 기형적으로 차이가 나는데, 배를 탄다는 말만 들어도 아가씨들이 모두 도망가서 학교마저 문을 닫게 생겼다니 변화무쌍한 세월이다.
한동안 세계 최대의 선원 배출국이었던 나라가 동남아 선원들을 싹쓸이해 가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단다. 중국 경제의 성장과 비약적인 발전도 여기까지가 한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세월의 흐름과 인간의 미래를 누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으랴?
‘오직 신만이 아시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