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3대양을 항해하는 선원은, 대서양과 인도양 쪽에서는 영국과 바이킹 후예들(노르웨이, 스웨덴)이 지배했는데 그리스 이태리 등 지중해 선원들이 보조 역할을 했다.
태평양 쪽은 미국 선원들 주된 구성원이었는데 배부른 그들이 험한 일을 기피하기 시작했고, 전후 복구 자금이 필요했던 일본과 독일인들이 잠시 들어왔다가 경제 사정이 나아져서 자국 상선대를 만들어 돌아가자, 대서양에서 경험을 쌓은 지중해 선원들 중의 일부가 태평양 쪽으로 옮겨왔다.
전후 세계경제는 빠른 속도로 팽창하여 물동량과 선박의 수는 늘어만 갔는데, 훈련된 선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세계 각국의 해운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임금의 수준을 높였지만 능력 있는 선원 확보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일본인들이 패전하고 도망갈 때 남긴 낡은 배들을 수리해서 현해탄을 오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경험을 살려서 1960년대 중반에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업하기 시작했고, 그 경력을 내밀고 미국 회사로 옮겨가기도 했다.
내가 해양 대학에 입학했던 197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경제 규모는 급격히 커져서 물동량이 폭증했지만, 미국과 일본 선원들이 더 이상 위험한 뱃생활을 하지 않으려 했고 선박을 운항해 본 경험이라도 있는 선원들을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 쪽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가진 게 인력밖에 없다고 할 정도로 빈곤해서 일자리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때라 하늘이 내려 준 기회로 여겼고 많은 사람이 자원하다 보니 마침내 한국 선원들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었다.
한 때는 우리나라 선원수첩을 가진 사람이 50만 명에 육박했다고 하니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국제적인 선원 시장의 모든 수요를 다 충족할 수는 없어서, 한동안 선원 수급은 해운 회사들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영어로 의사소통에 크게 문제가 없는 필리핀 선원들을 길러 내기 시작했지만, 승선시켜 보니, 눈치 빠르고 영리한 장점이 있는 반면에 책임감이 부족하고 변명이 많으며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치명적인 결함도 발견되었다.
필리핀 선원들의 한계점이 노출되자 다음으로 시도한 건 미얀마 선원들이었다. 우직하고 성실하기는 했지만, 발전 속도는 필리핀 선원들보다 느렸다. 또한, 정치적 혼란 때문에 언제 공급이 끊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 무렵에 중국 선원들도 잠시 등장했다가, 경제가 팽창해 자국의 상선대가 커지자 대부분이 자기들 선박으로 돌아갔는데, 사고방식 자체가 국제사회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시켜서 다국적 회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던 이유도 컸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도 모두 승선을 기피해서 중국 회사들도 중국 선원을 구경하기가 어려워졌고 우리보다 평균임금이 훨씬 더 높다니 참으로 변화무쌍한 세월이다.
2000년에 가까워지면서 마지막 시도는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인데, 양쪽 모두 영어가 약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고 음식과 종교 등의 다른 민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배타적이며 끈질김이 없이 쉽게 포기한다는 약점이 있다.
한국 선원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 것은 후발국 선원들이 늘어나면서 전성기 때보다 임금이 줄어든 탓도 있지만, 경제 개발로 경기가 좋아지자 육상으로 이직이 가능해졌고, 어느 정도 주머니가 차자 미국인이나 일본 선원들처럼 승선 기피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던 게 주된 요인이었다고 여겨진다.
한동안 그런 세월이 이어지다 보니, 한국 선원은 이직이 어려운 노인들만 남아서 경로당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다른 나라 선원들을 보충하지 않으면 운항할 수 없던 시대를 거쳐서, 이제는 국적선들마저 선기장 외의 인원은 혼승시키는 게 일반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에 내게는 아들이 많이 생겼다. 동남아 기관사들 중에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가짜 아들들이다. 한 녀석이 시작하니 다른 녀석들도 경쟁적으로 따라 한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자 사방에서 문자를 보내며 안부를 묻고 자신들의 근황을 전한다. 젊었을 때 어떤 점쟁이가 아들이 많대서 평생을 조심하고 살았는데, 이런 상황에 대한 예언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뻔했다.)
지금까지 언급한 건 태평양 쪽인데 인도양과 대서양을 항행하는 배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을 교육시켜 하급선원으로 쓰다가 1990년대에 접어들 때쯤 <페레스트로이카>로 동구권이 자유를 되찾자 그들과 함께 혼승시키기 시작했다.
선발주자는 유고 연방에서 분리된 크레이샤(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주축이었지만,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선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니 고임금의 서유럽 선원들은 밥벌이를 뺏길 수밖에 없었다.
내란이 일어나 세르비아와 크레이샤는 서로 전쟁 중애도 동승하는 경우도 흔했다. 정치와 경제를 구분한다고는 했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봐도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불만을 표하거나 표시를 내지 않았다. (일용할 양식은 이렇게 소중한 것이다.)
당시에 많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선원들도 같은 배에서 함께 근무하곤 했었는데, 이번 전쟁 중에도 동승을 계속하는지? 사이가 저 정도로 틀어졌으면 웃으면서 그렇게 지내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돈을 좇아 승선했기 때문에 어느 나라 회사나 바다라도 가리지 않았고, 중간에 땅에 내려 관련 업종에서 일하다 다시 배로 돌아와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내가 바다를 떠났던 2000년 전후만 해도 다른 나라 선원들의 평균임금이 한국 선원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오래 떠나 있다가 돌아와 보니 이제는 역전이 되어 인도나 필리핀 선원들은 우리보다 20~30%는 더 많이 받는다. 우리가 무시하던 중국 선원들은 그보다 더 받는다고 들었다. 동유럽 선원들은 조사해 보지 못했지만 상식적으로는 그들보다 더 받는다고 보인다. 아무리 적자생존이요 수요 공급의 원칙이라지만, 한국의 선원 대리점들이나 선주들의 욕심이 지나치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데, 이러니 유능한 젊은 사관들은 모두 바다를 등지고 나니 갈 곳 없는 노인들만 남았고 선원들의 질이 떨어지니 경쟁력도 차츰 잃어버렸던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이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얘기를 길게 늘어놓은 것은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바다와 선원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다면 현실을 정확하게 일깨워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싸여 있는데 북쪽은 북한이 가로막고 있어서 사실상 섬나라와 다름이 없고, 자원이 부족해 수입과 수출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한 입지조건인데, 해운과 선원의 중요성을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아서 서운하다.
우리 선원들은 그동안 바다 위를 떠돌면서 외화를 벌어들여 경제 개발에 기여했고, 수출입에 필요한 물자를 나르느라 청춘을 바쳤지만 이제는 늙어 대부분이 바다를 떠났고 마지막 남은 소수만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이어받을 젊은이들도 없으니 그 명맥도 곧 끊어지게 생겼다.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해운 산업도 끝나는 건 불을 보듯 뻔한데, 아무도 그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노동력이 필요하면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면 된다는 간단한 사실도 모르는 늙은이의 지나친 노파심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