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포르스> 해협을 따라 흑해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튀르키예 최대항 <이스탄불>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의 하나인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니 역사가 오래된 항구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세계 제국 건설을 꿈꾸며 로마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는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며 한동안은 지상에서 가장 크고 중심이 되는 항구로 번성하기도 했었는데, 14세기 중반에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술탄에게 정복당하자 기가 꺾였다.
붉은 바탕에 눈썹달과 샛별이 그려진 튀르키예 국기가 그때 만들어졌고, 새벽에 그 도시로 입성할 때 봤던 하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데, 공화정으로 바뀔 때 비율은 약간 조정했지만 문양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전성기의 그들의 위세가 얼마나 당당했던지, 서유럽인들에게는 긴 세월 동안 공포의 대상이었다. 프랑스에서 유행했던 <크루아상>의 모습이 새벽달이었던 건 그들을 먹어 치우자는 민족적 각오와 합의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이 항구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로 바꿔 부르게 된 일화가 재미있다. 오스만 술탄이 그곳을 정벌하기 전에 사전 탐사를 위해 밀정을 보냈는데, 외항에서 고기를 잡다가 돌아오는 그리스 어부에게 그가 물어봤다. ‘저기 보이는 항구 이름이 뭐요?’ 하니 ‘저 도시 말이요?’하고 되물었는데, 성질이 급한 밀정은 앞부분만 듣고 돌아가서 그대로 보고를 했고, 그리스어로 <저 도시>라는 뜻의 이스탄불이란 이름이 탄생했단다. 믿거나 말거나. 원래부터 허풍이 센 그리스 선원들의 주장이다. (영국 탐험가가 호주에서 이상하게 생긴 동물을 발견하자 ‘저 동물의 이름이 뭐요?’ 하고 묻자 원주민이 ‘나도 모르오.’라는 뜻으로 ‘캥거루’라고 대답했는데, 그게 이름이 되었다는 일화와 비슷하다.).
이스탄불은 이슬람교를 믿던 그 술탄이 종교는 다르지만 동로마제국의 후계자임을 선포하면서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옛날의 번영과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다.
전문적인 학자도 아닌 내가 이 항구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을 갖는 것은 내 젊은 날의 꿈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소련이 무너지고 개방되기 직전이었는데 나는 흑해 안쪽을 드나들던 곡물선을 타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는, 이스탄불에서 해운 관련업을 시작하면 금방 성공할 것처럼 보여서 이곳으로 이주하고 사업을 하기 위한 준비를 몇 년 동안 하며 공을 들였다.
튀르키예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현지인들과 불편 없이 대화가 통할 수준까지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그 언어를 공부할 수 있는 학교나 전공자가 하나도 없어서 자료를 일본과 미국에서 구입해 독학으로 익혔다.
다행히 그 언어는 우리와 같은 우랄알타이어 계통이라서 닮은 점이 많고 문법이나 발음도 비교적 쉬워서 공부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는데, 예를 들면, 목적어나 보어보다는 동사가 뒤에 오는 어순이 우리말과 같아 친근감이 느껴졌다.
동사의 시제 변화도 복잡하지 않았으며 부정하는 말에는 끝에다 ‘마’자만 붙이면 되는 것도 신기했고, 낱말을 연결해 문장을 만들 때도 우리에게는 익숙한 조사가 있어 사용하기가 편리했지만, 알파벳은 독일어 쪽에서 따 왔는지 <움라우트>를 붙인 단어들이 많아서 약간 헷갈리고 귀찮을 때가 있기는 했다.
언어적인 소통이 어느 정도는 가능해졌으니 다음은 현장 점검을 해 볼 차례라 판단되어, 낡은 차 한 대를 빌려서 몰고 한 달 가까이 도시에서부터 농촌 지역까지 그 나라 방방 곳곳을 훑고 다녔다.
그때 발견했던 건 농촌 지역일수록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야자들만 노동을 시킨다는 점이었다. 면화 수확과 과일 따기도 모두 여자들의 몫이었고, 남자들은 마을 앞 공터에 모여 앉아 물담배를 피우거나 차를 마시며 새살이나 까는 게 일과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주도로 장가가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적은 있지만, 이건 완전히 불한당 같은 놈들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노인들 중에 한국동란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덕분에 말 붙이기는 쉬웠지만, 이 나라 남자들을 전적으로 믿거나 사업 파트너로 삼을 수 없다는 부정적 고정관념이 생긴 건, 그곳으로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던 청년에게는 악영향을 미쳤다.
학교에 가보니 내가 어렸을 때처럼 아침마다 운동장에 서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했는데, 길어서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나는 튀르키예인이므로 바르고 근면하다.”는 내용은 아직도 기억난다.
학교에 입학할 때는 ‘죽여도 좋습니다.’ 하는 맹세를 해야 입교가 허락된다고 하니 선생님은 신과 같은 존재였고 밖에 나와서도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것 같았다.
유교를 숭상하지도 않았을 텐데 장유유서는 분명했고, 길거리에서 노인에게 뺨을 맞아도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지 못했지만, 마을에 학교 선생님이 나타나면 머리가 허연 늙은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드리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이런 과정을 모두 마친 후 나의 계획을 아내에게 말했더니 그녀는 단칼에 잘랐다.
“이혼하고 당신 혼자 가시오.”
단호한 선언으로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내가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것은 나 혼자 호의호식하자는 건 아니었으니, 가족의 동행이나 지지가 없다면 무의미한 일이었다.
“거부할 거면, 일찍 하지. 시간 낭비라도 줄이게. 그동안 내가 준비하고 있는 걸 몰랐나?”
“무슨 일에 빠져 있을 때는 당신이 내 말을 잘 듣는 사람이오? 그렇게 수선을 피우는데 나도 어찌 동행을 고려해 보지 않았겠소?”
그렇게 쉽게 포기한 걸 보면 설치기만 했지 사실은 나도 어느 정도는 싫증이 났고 자신이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걸 아내가 눈치채고 맞고 싶은 뺨을 때려 준 게 아니었던가 싶다. 그렇게 절실했던가 하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았으면 혼자라도 출발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 후에 나 혼자 외국에 나가 살다 돌아왔던 적도 몇 번 있었다. 이 건과는 달랐던 건 안정된 직장에 취업한 상태로 월급을 받으며 일을 하다가 왔다는 점이다. 맨손으로 낯선 땅에 뛰어들어 사업을 한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데, 나는 영육이 모두 그렇게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몰두했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보다 실력도 빨리 늘었다. 마작, 바둑, 당구, 골프 모두 그랬다.
그런데 어느 정도 지나 양이 차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끝내고 다른 취미로 갈아타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대부분의 종목에서 아마추어로는 고수라지만, 프로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런 나의 취향과 습관을 오래 지켜본 아내가 그걸 몰랐을 까닭이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스치듯 그때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아내의 대답은 역시 내가 추측했던 대로였다. 타고난 역마살 때문에 뱃사람이 된 건 운명이었지만 한 곳에 정착하는 유형은 아니라고 하기에, 평생 한 여인에게만 충성을 바치고 있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점수를 따기 위한 아부성 발언이었다. 아직은 승선을 하고 있으니 숙식을 걱정하거나 신세 질 일은 없지만, 이제 곧 은퇴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영국 선장들이 입버릇처럼 ‘남자의 능력 중에 제일은 아첨이다.’ 하던 농담이 생각났다.
아무튼 나의 튀르키예에 대한 짝사랑은 그렇게 끝났고, 더 이상 공부할 생각도 없는데 움켜쥐고 있을 이유도 없어서, 갖고 있던 자료들을 몽땅 싸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기증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일이 일어난 지 십여 년쯤 세월이 더 흐른 후 그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그 대학의 지방 분교에 튀르키예어과를 신설할 예정인데, 그곳으로 내려가 학생들을 가르쳐 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미 공부했던 걸 대부분 잊어버렸고 다른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라 정중히 거부했다. 세월이 또 많이 흘렀으니, 이제는 아직도 그 학과가 운영되고 있는지 어떤지도 모른다.
(사실은 나도 당시에 쓰던 수첩 한 권만은 기념으로 남겨 뒀고 지금도 승선 가방 구석에 있는데, 간혹 꺼내 보며 추억에 잠기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 언어를 완전히 잊어버리지는 않은 것도 그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