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아브르>는 파리 북동쪽에 있는 항구다, 센 강(La Sein) 하구의 오른쪽에 자리한 노르망디에서 대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르(Le)’는 정관사이고 ‘아브르(Havre)’는 항구라는 뜻이니 16세기에 군항으로 처음 시작했다는데, 그때부터 특별한 유래나 이름도 없이 ‘파리 외항’으로만 알려졌던 것 같다.(H나 J자 묵음은 지중해 쪽 언어들의 일반적인 특성인데, 스페인어나 포르투갈어에서는 G를 H로 발음해서 혼란을 주기도 한다.)
2차 대전 중 연합군으로부터 무참하게 포격 당해 항구 전체가 거의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에, 전후에 급히 블록으로 급조해 단순하고 실용적인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선원들은 물자 수송을 담당하는 게 주된 임무이므로 이 항구에 자주 입항하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크게 볼 게 없어서 파리 관광을 위한 기착지 정도로 생각하는데, 관광 안내 책자에는 우리와는 반대 방향으로 파리에서 출발해 이곳으로 왔다가는 코스가 소개되어 있어서 ‘그런 일도 있구나.’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파리의 중심가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쯤 거리로 나와 있지만, 고속 열차(TGV)를 타면 한 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여기 입항할 때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파리를 갔다 와서 몇 번인가 기억나지도 않지만, 그중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아내와 동승한 배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다.
치매에 걸리면, 선택적 기억만 남는다고 하던데, 나의 오랜 뱃생활 증에서는 처음 승선했던 실습생 시절과 아내와 동승했던 1년 남짓한 기간이 가장 오래 남을 부분인 것 같다.
사실, 나는 파리에는 너무 자주 가서 익숙한 이웃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큰 감흥이 없다. 그러나 아내를 데리고 가보니 사내들끼리 갔을 때보다 특별함이 있어서 기억에 남은 듯하다.
1984년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고속 열차가 아직 없을 때라, 그걸 타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촌놈이라 놀림받기도 했다. 그리고 화장실이 없어서 에펠탑과 몽마르트 언덕 귀퉁이에서 소변을 보게 하고 엉덩이를 가려 주었던 적도 있다. 이는 내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내와 함께 갔을 때는 뭣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루브르 박물관>이나 <오르세 미술관>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게 아쉬움으로 남았던지 아내는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혼자서 파리 여행을 감행했던 것 같다. 나와 함께 가보지 못했던 곳만 골라 갔는지, 앨범에는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들어 있었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미술을 전공한 그녀에게 일반 관광지만 보여 줬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우리 국민들에게는 비교적 익숙하게 느껴지는 나라지만, 나는 그 나라 사람들과 가깝게 지낸 사람이나 경험을 공유했던 적이 거의 없다.
그들이 나의 직업인 선원, 해운, 기계 어느 쪽에도 우리와 겹치는 부분이 많지 않았고, 내가 그들의 말에 능통하지 못한데 그들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어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프랑스어였고, 승선 중에도 그곳에 갈 때마다 불편을 느껴서 회화 공부를 한다고 노력했는 데도 내게는 언제나 어려운 언어였고, 통역까지 써 가며 만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요즘처럼 핸드폰 속의 AI가 통역을 해주는 세상이었더라면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었을 텐데 싶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다가, 내가 최근에 그곳으로 갔을 때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걸 발견하고는 이들과 소원했던 이유는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차이에서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유럽 연합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 대표끼리 매일 싸운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이 영국인에게 ‘하는 짓이 장사꾼이니 언어도 거간꾼 닮았다.’고 비난하자, 영국인은 독일 대표에게 ‘너는 왜 말은 안 하고 개 짖는 흉내만 내냐?’고 화살을 넘겼고, 독일인은 프랑스 사람에게 ‘동성연애자가 많다더니 너희 말은 그들이 만들었냐?’ 하더란다. (우리 시대에나 통하던 아재 개그다. 지금은 영국이 연합에서 탈퇴했으니 다툴 일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