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친구 <에릭 안데르센>을 처음 만났던 건 30대 초반에 내가 독일 선박의 기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그 배에 수리할 일이 있어서 엔지니어를 요청했더니 잠깐 방선했다가 갔다.
그 후에 내가 귀국해서 국내에 있는 조선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우연히 두 번째로 만나게 되었다. 조선 기자재 업체를 차려 수주 영업을 하러 온 것이다. 그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최대한으로 도와줬고, 그는 대단한 조력자를 만난 셈이었다.
에릭이 나보다는 나이가 약간 위이긴 했지만 나이와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는 계속 기업가로 승승장구하며 자신의 기업을 키워 갔지만, 나는 계속 내 생활에 만족하며 살아갔다.
그는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고 자랑스러웠는지 틈만 나면 나에게 자기가 투자하고 도울 테니 사업을 시작하라고 권했다. 아니면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아시아 지역 총책을 맡아 달라고 졸라대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에릭은 또 나에게 그의 조국인 덴마크로 한 번 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시간만 내주면 모든 준비나 경비는 자신이 처리해 놓겠다고 했다. 그 제안은 약간 솔깃했지만,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 근처 나라인 독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이왕 유럽으로 가는 김에 코펜하겐에 있는 선박 주기관 제작사와 세계 최대의 해운 회사도 둘러보고 오겠다는 계획서를 올렸더니 승인이 났다. 떳떳하게 덴마크에 가서 에릭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에게도 통보한 후, 독일로 갔다가 함부르크에서 출발해 코펜하겐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함부르크에서 코펜하겐까지 기차 여행이 가능한데 이는 <킬>에서 <롤란드> 섬 사이의 바다에 특별히 제작된 운반선이 있어 기차를 싣고 건너가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사전에 조사를 하여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운반선에 들어가는 차량은 길었고 손님도 많았다. 그래서 운반선 한 척에 모두 적재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킬>에 도착하니 기차를 실을 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동안 내가 봤던 일반 자동차 운반선보다 덩치가 더 컸다. 기차가 부두에 도착하니 배의 꽁무니에 달려 있던 램프(기차 레일이 달린 대형 문짝)가 부두에 걸쳐졌고 임시로 만들어진 철로를 따라 기차들이 배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갔다.
기차를 모두 싣는데 30분, 항해 50분, 차량이 부두로 나가고 승객이 타는 데 걸리는 시간이 40분, 바다를 건너가는 데만 합계 2시간쯤 걸리는 기이한 항해였다.
이 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승객들은 기자에서 내려 선실로 올라가는데, 바. 레스토랑, 나이트클럽, 면세점까지 두루 갖춰진 고속도로 휴게소 비슷했다.
한쪽에서는 술을 마시고 악단의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거나 블루스나 탱고 리듬에 몸을 맡긴 커플들도 보이고, 면세점은 물건을 사고파는 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힘에 부칠 정도로 큰 가방을 든 노인에게 ‘물건 값이 차이가 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자신은 매일 이 배로 출퇴근하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게 직업이라고 했다.
“그럼 이 배 선원입니까?”
“아니요, 선원은 아니고 그냥 단골손님입니다. 집에서 놀면 뭐 합니까? 움직일 수 있을 떼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둬야죠.”
우리나라 노인들처럼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더 남겨 주려고 안달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도, 복지국가라는 유럽에서도 노인들의 삶은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코펜하겐에 도착하니 에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답게 영리하고 용의주도했다. 만나야 할 사람들을 시간별로 예약해 놓아서 내 일을 많이 줄여 놓았다.
덴마크 사람들과 미팅을 이어가는 동안, 이상한 현상을 한 가지 발견했다. 자꾸만 딸꾹질을 하길래 속이 불편한가 싶어서 물 마시기를 권했는데, 다음 사람도 같았고 그다음 사람도 마찬가지 증상을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아서 에릭에게 물어봤더니 웃으면서 대답했다.
바이킹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적인 손님 접대법이란다. 딸꾹질은 “저는 당신의 말씀을 긴장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라는 무언의 표시란다. “긴장해서 딸꾹질이 나오면, 만족했을 때는 트림을 해야 하나?” 하고 내가 물었더니 파안대소를 했다.
대부분의 미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일찍 끝났다. 떡본 김에 제사를 지낸다는데, 코펜하겐에 온 김에 시내를 둘러보지 않고 떠날 수는 없었다.
그의 차를 타고 관광 코스를 돌다가, 중심가를 지나가며 보니 넓은 지역이 버려진 할렘가처럼 보였다. 무슨 곡절아 있을 것 같아서 에릭에게 물어봤더니 히피촌이라고 했다. 뉴욕, 로마 등의 오래된 대도시마다 비슷한 곳은 있었지만 이렇게 피폐해 보이지는 않았다.
구도시 중심부를 정비하려고 정부에서 부동산들을 매입하고 주민들을 소개하는 도중에 히피들이 점령해 버렸다고 한다. 그들을 쫓아내려고 전기와 수도도 끊어 버리는 강경책을 써 보기도 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이길 수가 없었단다.
그럼 앞으로도 저런 상태로 계속 방치할 수밖에 없느냐고 물었더니, 불을 지르거나 폭격을 할 수밖에 없는데, 살인을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반문하였다.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희귀한 결과물이었다.
이튿날은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생가가 있는 핀 섬으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보고 싶어서 억지로 만들어 낸 일정이었다. 에릭은 출장 중인 나의 입장을 이해했는지 그곳에 있는 중소기업을 두세 개 방문하는 걸로 계획을 세워 뒀다.
처음 간 곳은 시골 마을 한가운데 있는 회사였는데, 동네 입구로 들어서며 보니 곳곳에 만국기 줄이 늘어져 있어서 작은 국제 행사의 뒤끝인가 여겼더니 회사 앞에는 대형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애국가가 연주되고 있어서 민망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사장실은 화려하게 꾸며 놨는데, 생산 시설이나 공장은 보여 주지 않았다. 사기꾼 같았다. 그런데 그다음 회사를 방문해 봐도 비슷한 패턴이었다. 이것도 이들의 문화고 사업하는 방법임을 깨달았지만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이런 방법으로 사업을 해서 작은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으니 사족을 달지는 못해도, 에릭의 동업 제안을 거절했던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는 확신을 할 수는 있었다.
덴마크가 부유한 나라가 된 건 꼭 이런 이유만은 아니다. 유틀란트 반도에서 생산되는 낙농 제품이 세계 최고라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고, 비록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지만 <그린란드>라는 거대한 섬과 지하자원이 모두 그들의 소유라는 걸 알면, 그렇게 성급히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데사>에 있는 <안데르센> 생가와 기념관은 유명하기만 했지 사진과 책 몇 권 전시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볼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유틀란트 반도>의 풍차와 방풍림을 보러 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사실은, 시간이 더 충분했다면 리베(Rebe)란 도시에 새로 조성했다는 바이킹 박물관을 가보고 싶었는데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벼루기만 했지 한 번도 가볼 기회는 없었다.
흔히들, 바이킹이라고 하면 노르웨이를 먼저 떠올리지만, 그들은 어부 출신의 투사들이었고, 영국이나 유럽 쪽을 침입했다가 정착해서 농사를 짓고 상업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덴마크 출신들이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 박물관에 가서 보고 싶었던 건 싸움에 능숙했던 흔적들이 아니라 머리를 쓰며 성실하게 살던 바이킹의 모습들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돌아서며, 에릭에게 혹시 안데르센과 같은 집안이냐고 물었더니, 그건 덴마크에서 가장 흔한 이름인데 모친의 취향으로 붙였으며 핏줄로 연결된 근거는 찾을 수 없었단다.
‘덴마크 여인의 7할은 평생 한 번도 결혼하지 못하고 전 국민의 7할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통계를 본 것 같은데, 괜한 질문을 해서 아픈 곳을 건드렸는지도 모른다.
코펜하겐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엔리코 달가스>로 화제를 바꿔 봤다. 그런데 에릭은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무식해서 그런가 싶어서 그 후에 만난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유틀란트 간척지와 방풍림을 조성한 애국자로 우리나라에는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내 또래는 거의 이 사람 이름을 거의 다 아는데, 그런 위인이 본토에서는 천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바쁘게 살다 보니 국사 같은 건 공부할 시간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정책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위인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19세기의 실존 인물은 틀림이 없었다.
그는 프랑스의 위그노(개신교도) 집안에서 출생했는데, 이태리 나폴리에서 성장한 후, 덴마크로 가서 자신이 바이킹의 후예라 선언하고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지만, 이런 성장 배경 때문에 핏줄을 의심받고 그 업적이 과소평가되었을 수도 있었겠다.
우리나라에 그가 대단한 인물로 소개되었던 건, 3공 시절 <새마을 운동>과 관련된 것 같기는 한데, 간척을 하고 방풍림을 심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본국인들도 잘 모르는 인물을 멀리 떨어진 이국에서 위인으로 추앙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에릭의 초대로 덴마크를 방문했던 이후에도, 그와는 오랫동안 교류했고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며 친하게 지나기는 했지만, 크게 금전적인 거래나 동업을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덴마크 여행 때 느꼈던 경계심이 평생을 따라다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