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는 외국 거리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런데 요즘은 묻지도 않고 대답도 않았는데도 대개는 한국인인 줄 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만 “북쪽이냐 남쪽이냐?” 하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도 내가 남쪽 사람인 줄은 이미 알고 있다. 내 조국의 국력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승선 생활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추측해 보라면, 일본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심지어는 에스키모까지 주워섬기면서도 한국이란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인이란 게 밝혀지면 반드시 “북쪽이냐 남쪽이냐?”는 질문이 따랐다
지금은 어디를 가더라도 선진국민이란 건 인정받고 있지만, 그게 안전을 보장받는 징표는 아니다. 오히려 복주머니라고 오해받을 수 있으니 훨씬 더 많은 조심이 필요하다.
지구상에서 밤에 혼자 걸어 다녀도 대체적으로 안전한 거리는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정도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안전에 불감증이 걸려 살다가 다른 나라로 나가면 그들도 우리와 비슷할 거라고 방심하다가는 큰코다친다.
미국 <볼티모어>는 <메릴랜드 주>의 관문 역할을 하는 항구도시다.
통신장이 함께 승선하고 있을 때였으니 오래전 일이지만, 바로 그 항구의 다리 근처에서 총기 사고를 당했다. 평화롭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빈부 격차가 심해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므로 조심했어야 하는데 선원들 숫자만 믿고 방심했던 결과였다.
선원들과 함께 오후에 상륙했다가 밤 10시쯤 귀선을 하려고 일어섰다. 도중에 <할렘> 가를 지나야 하는 게 마음에 약간 걸렸지만, 선원들의 숫자도 많고 부두까지 거리도 멀지 않은 것 같아서 운동 삼아 도보로 귀선하기로 했다.
역시 타관에서는 찝찝한 건 피해야 한다. 위험한 거리를 거의 지났다고 안심했을 때 권총을 든 떼강도를 만났다. 나는 지갑에 남아 있던 적은 액수의 돈을 모두 주고 위기를 모면했는데, 몇몇 선원들은 그 돈이 아까웠는지 갑자기 배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멍청히 서 있다가 나도 어떤 변고를 당할지 몰라 불안했고, 젊었기에 달리기에는 자신이 있을 때여서 그들을 따라 무조건 뛰었다. 총소리가 몇 방 들리기도 했지만, 무사히 배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머리수를 세어 보니 그 또한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통신장의 운동화가 붉게 변해 있었다. 급히 도망쳐 오다가 발을 다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물었다.
“어이, 국장(통신국장에서 유래한 통신장의 별칭), 발이 왜 그래?”
그 말을 듣고 당사자도 이상한지 아래를 내려다보고 나서, ‘아프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피가 난 것 같습니다.’ 하더니 ‘아이쿠’ 하면서 주저앉은 후에 의식을 잃어버렸다.
바지를 벗겨 내고 살펴봤더니 엉덩이에 총알이 박혀 있었다. 그곳에서 피가 흘러서 신발까지 적셨던 것이다. 긴장했을 때는 모르고 있다가 피를 보는 순간 정신을 잃었는데, 발사 지점이 멀기도 했지만 두꺼운 청바지 뒷주머니와 가죽 지갑이 목숨을 지켜 준 셈이다.
이 사고보다는 훨씬 후의 일이지만, 이왕 미국 이야기를 하던 참이니, 그 나라에서 겪은 황당한 얘기를 하나 더 덧붙이려 한다.
그날 밤 나는 뉴욕 맨해튼 15번가에 있는 호텔에 숙박하고 있었다. 그런데 담배가 떨어져서 창밖을 내다보니 바로 근처에 편의점이 보였다. 걸어가더라도 5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아서 호텔을 나섰는데, 1분도 되기 전에 뒤에서 걸걸하고 투박한 음성이 들렸다.
“선생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흑인이었다. 뻔히 돈 달라는 소린 줄은 알았지만, 내게는 백 불짜리 한 장 밖에 없어서 못 들은 척하며 길을 건넜다. 한데 발밑에 그림자까지 길게 단 녀석이 어떻게 공간 이동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금방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보세요. 저기서 왼쪽으로 갔다가 오른쪽으로 돌면 늦게까지 여는 레스토랑이 있소.”
빠져나갈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궁여지책으로 길안내를 해주자, 가로등 불빛을 등에 지고 서 있던 녀석이 돌아서며 씩 웃었다. 얼굴은 어둠 속에 파묻히고 하얀 이빨의 잔상만 남은 괴물 같았다.
“선생님은 돈을 가졌지만 저는 그게 없습니다.”
이제는 백 불을 포기하고 목숨을 지키는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녀석에게 돈만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내 사정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봤다.
녀석은 껄껄 웃더니 원하는 물건은 사게 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비싼 담배를 피우게 됐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로 그거라도 건졌으니 되었다고 자위했다. 그런데 녀석이 자기에게 적선하는 건 5불이면 충분하다며 나머지를 돌려줬다. 덕분에 원하는 걸 사고도 돈이 많이 남았다.
그는 내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더니 경호원을 자칭하며 호텔 정문까지 따라왔다. 그러고는 밤에는 위험하니 낮에만 나다니라고 충고까지 남겼다. 친절하고 멋진 거지였다.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항상 이렇게 점잖은 사람만 만나는 건 아니다. 하기야 우리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도 텃세라는 게 있었는데, 세계화가 되고 국경의 의미가 퇴색해 간다고 크게 달라지기야 하겠나? 그래서 나는 내 고향만 떠나면 토박이들과는 가능하면 분쟁을 만들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