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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일론 신자

by 연후 할아버지

1. 나일론 신자


내가 천주교의 영세를 받은 건 결혼 직후였으니, 벌써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나는 개신교 신자였는데, 결혼을 하고 보니 아내가 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신혼부부가 주일마다 서로 다른 교회를 다니는 게 보기에도 좋지 않았고 서로 불편하기도 해서 합치기는 해야겠는데, 그녀는 조상으로부터 4대째 내려온 뿌리 깊은 신앙이라, 나를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무거운 절보다는 가벼운 중이 떠나는 게 순리다. 비교적 연륜이 짧은 내가 그녀 쪽으로 옮겨가는 게 정답인 것 같았고, 내 직업이 선원이라 승선 중에는 어차피 교회에 다닐 수 없다는 현실적 계산도 작용했다.


그래서 깐에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는데, 정작 옮겨 가 보니 쉽게 적응이 되지는 않았다. 같은 성경을 사용하는 큰집 작은집 정도로만 상상하고 있다가 막상 교리 수업을 받아 보니 다른 게 너무 많아, 내 추측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신교에는 없는 연옥이란 개념도 생소했지만, 많은 축일과 기념일, 그리고 성인들을 통한 전구 기도도 그랬다. 활발한 찬송가를 부르는 예배가 아니라, 조용한 미사곡을 들으며 사제의 집전으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미사는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고민은 결정하기 전에나 하는 법,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번 시작하면 끈질기게 지속하는 건 산골 출신의 우직한 특성이다. 의욕이 부족하고 수동적인 태도라고 간혹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내의 눈치를 봐 가며 열심히 따라다니기는 했다.



그런 세월이 십여 년쯤 흐른 후, 배에서 내려 육상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 부임지가 거제도에 있는 조선소였다. 어느 날 그곳 본당의 신부님께서 부르시더니 갑자기 견진성사를 받으라신다.


세례 받은 지는 한참 되었지만 영세 때도 교리 공부가 부실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직장을 옮긴 직후라 견진 수업을 받을 시간마저 부족했다. 그래서 다음 기회로 미뤄 달라고 부탁했더니 신부님께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우선, 성사 날짜가 코앞에 닥쳤으니 가능할 때 성사를 일단 받아 놓는 게 좋겠다고 하시며, 이도 주님 뜻이라 여기란다.


덧붙여서, 사제 생활을 하는 동안 나와 비슷한 신자를 여러 명 만났는데, 이렇게 시작한 신앙일수록 나일론 빨랫줄처럼 질기고 오래 가더라며, 공부는 시간이 날 때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데 면전에서 거부하기도 어려워 엉거주춤 서 있다가 물러 나왔다.


확답을 않고 떠난 나의 태도가 마음에 걸리셨는지, 주일미사 강론 중에 나를 호명하시더니 당신의 영적인 눈으로 미래를 보니 <나일론신자>는 평생 배교하지 않더라고 격려까지 하셨는데, 졸지에 그게 그 성당 안에서 내 별명으로 고착되고 말았다.


그런 놀림을 받던 자가 그 후로 반세기 가까운 신앙생활을 이어왔다. 신부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불명예스러운 호칭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는 했으니, 그분께서 미래를 보는 밝은 눈을 지니고 계셨던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견진을 받고도 세월이 한참 흐른 후의 일이다.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그곳에서 사업을 벌려 크게 성공한 대학 동기생을 오랜만에 만나 식사를 하며 회포를 풀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지금은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개신교회의 장로직을 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창 시절에는 그가 가톨릭 학생회 회장이었고 나는 기독학생회를 이끌었던 것이 기억났는데 세월이 지나자 반대의 입장이 된 게 신기해서 물어봤다.

“친구야, 성당을 버리고 개신교로 옮겨가니 좋더냐?”

“응, 바쁜 세상에 누구도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직거래할 수 있어서 편하긴 하더라.”


그가 말하는 직거래는 성모님이나 성인들에게 전구를 통하지 않고 하느님에게만 기도하는 면을 의미한다. 그러나 친구가 직거래에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전구를 통해 은총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에 익숙해졌으니 우스울 따름이다.



내가 항상 미지근하고 성의 없는 신자인데 반해, 아내는 평생 동안 광신도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 왔다. 매일 한 번 보는 미사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성당을 옮겨 다니며 두세 번씩 미사를 드리고도 부족한지, 틈만 나면 성체조배실 감실 앞에 엎드려서 기도하는 걸로 소일을 한다.


대부분의 날을 집을 떠나 객지를 헤매는 남편의 직업 때문에 생긴 병이란 생각이 들어 늘 미안하고 안타깝지만,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고 이제 와서 내 직업을 바꿀 수도 없으니 막을 명분도 방법도 없다. 그래서 가끔 묻는다.

“기도드릴 게 그렇게 많나?”

“자식들이 몇이고? 인제는 손주들도 많은데, 바다에 떠 있는 남편 기도를 빼먹을 수도 없고.”

“이 사람아, 그건 구복이지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네.”

“난 그렇게 어려운 건 모르요. 내 자식들 모두 잘되고, 당신 무사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소”

그래, 내가 죄인이다.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휴가 때면 아내의 건강이 걱정되어 더욱 부지런히 따라다닌다. 덕분에, 휴가 기간이 길지 않더라도 내가 성당 가서 성체를 모시는 횟수는 일 년 내내 주일에만 미사에 참석하는 보통의 신자들보다는 많다.


아내의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아들들은 모두 유아세례를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는 겉보기로는 열심히 성당에 나가고 있으며, 강요한 적도 없는데 그들의 아내(내 며느리)들도 모두 가톨릭 가문 출신이라 성가정을 이뤘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생각해도 그건 대단한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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