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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Jun 13. 2020

유비가 무환이다.

알찬 주말을 보내고 싶은 직장인의 일상

 꿀같은 주말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전날 늦게 잠에 들어 천근같은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매우 버겁다. 하지만 아침 스케쥴이 있기에, 그리고 그 스케쥴을 제때 잘 소화해야 하루 일정이 틀어지지 않기 때문에 억지로 일어난다. 양치질을 하고 유산균을 먹는다. 유산균은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리바이오틱스가 함께 들어있는 걸 먹는다. 그래야 유산균이 오래 살아남아 일을 한다. 그럼 나도 일을 할 힘이 더 솟아날 것이다. 


 체중을 재고 나니, 어제보다 0.4kg 정도 늘었다. 왔다갔다 하는 체중이라 큰 신경 쓰지 않는다. 과식하지도 않고 끼니를 거르지도 않는 패턴이라 몇달째 그대로다. 하지만 근력운동을 하지 못해 힘이 없어 괴롭다. 얼른 재활을 끝내고 남들처럼 헬스장을 다니고 싶다. 헬스장 다니는게 버킷리스트가 될 줄이야.


 와이프가 차려준 아침을 맛있게 먹는다. 여전히 눈은 잘 떠지지 않는다. 잠을 깨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어 음악 재생 어플을 켠다.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노래를 재생한다. 언제 어디서나 들어도 좋을만한 노래다. 그러나 눈은 잘 떠지지 않는다. 내가 눈을 감고 온몸으로 음악감상을 하고 있자, 와이프가 제안한다. 


"몸 말고 눈으로 음악을 들어볼래?" 


 바로 실행에 옮긴다. 몸은 고정한 채 눈알을 360도 굴리며 음악에 감동하는 내 감정을 표현하려 애쓴다. 그러자 너무 신기하게도 무겁던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혜자로운 와이프다. 그 길로 아침식사를 끝내고, 외출준비를 한다. 일정은 '차량 에어컨 고치기'. 평일에 차를 맡길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토요일밖에 카센터 갈 시간이 없다. 그리고, 토요일에는 예약을 받지 않아 선착순으로 차를 맡겨야 한다. 그래서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전날 밤 이미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아침에도 늑장을 부린 탓에 카센터에 도착했을 때는 나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십수 명이나 와있었다. 망했다.


 가장 큰 과업인 재활치료를 다른 지역에서 받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라, 대중교통을 타고 갈 수 없는 찝찝한 상황이라 자차를 운전하고 가야 한다. 운전 자체는 할만한데, 무더위가 문제다. 지난 주에 이미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사우나 차'로 왕복 4시간을 다녀왔다. 죽을 뻔 했다. 그래서 이번 주 만큼은 꼭 수리를 마치고 가려 했으나 이대로라면 오늘 수리를 못 받을 수도 있다. 차도 못 고치고, 재활치료도 못받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차를 고치는 동안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가져왔기에, 이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지 않지만 매우 안타까운 상황이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TV 뉴스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홀로 글을 쓰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지만, 차를 늦게 고치는 것 말고는 딱히 꿀릴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지, 이 글의 주제는 그게 아니지. 일찍 나오지 못해 하루 일정이 틀어진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나는 그들보다 못한 것이 맞다. '유비가 무환'인데, 나는 '무비가 유환'이 되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줄곧 이런 성향이었다. 아주 가끔 위기의식을 느낄 때, 또는 정말 의욕에 충만할 때를 제외하고는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계획이 틀어지는 일은 부지기수다. 계획을 수정하는 일이야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것이지만, 최소한의 준비와 실천의지는 필요하다. 간혹 '될 대로 되라'라는 마음을 갖고 움직이곤 하는데 이럴 때 일이 틀어지게 된다. 운이 좋아 그냥 넘어갈 때도 있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과제들일 경우에야 넘어가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된 일이라면 그냥 방치해서는 안될 습관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나의 성향과 반대되는 걸 추구해야 하다 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이 정도만 하자'라든가 '하면서 스트레스 받느니, 쉬는 게 낫다'라고 스스로를 위안하고는 했다. 이렇게 살 때 현상유지라도 되면 고수할만한 전략이 되겠지만, 내가 볼 때 이렇게 살다가는 점점 바닥으로 내려갈 것 같아 자꾸 떠올리는 것이다. '계획적으로 살자'고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계획하는 일들을 조금씩 해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정말 다행히도, 내 옆에는 철저한 계획 하에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와이프가 있다. 그래서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훌륭한 보완재가 되어주기도 한다. 서로를 닮아가기도 하다가 다시 원상복구 되기도 하는, 그런 고무줄 같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다소 낭만적이지 못한 비유긴 하나, 고무줄 만큼 끈끈한 것도 없다. 끊어지지 않는 팽팽한 고무줄이 되어 그녀 옆에 찰싹 붙어있어야겠다. 행여나 끊어지면? 묶어서 쓰지 뭐. 비유는 비유일 뿐, 깊게 생각하지 말자. 오늘은 즐거운 토요일,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책, 글, 그리고 동반자와 함께라면 못 기다릴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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