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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Jul 13. 2020

영업과 토마토 소스 스파게티의 상관관계,

있을까? 

 비가 오는 날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어두운 기운을 뿜어낸다. 이런 날에는 항상 은행에 와서 본인의 다운된 기분을 풀고 가는 사람들이 꼭 있었는데, 오늘도 조금 위험했다. 기다리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랬는지, 다행히 금방 업무를 보고 갔기에 서로 속이 상하는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손님이 아량을 베푼 건지, 내가 대처 능력이 좋아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후배 직원이 일주일간 휴가를 갔다. 코로나 시국에 딱히 갈 데도 없을 텐데, 비까지 오니 무얼 하고 놀고 있을지 걱정..은 아니고 그냥 궁금하다. 다음 주면 내가 휴가를 가기 때문이다. 하하.


 비가 조금 그친 오후에는 손님이 조금 밀렸다. 손님이 밀릴 때는 항상 고민을 한다. 업무 처리를 빨리 해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스피디한 전개를 보일지, 아니면 내 앞에 앉은 손님에게 어떤 마케팅을 할지 고민하면서 열심히 영업활동을 벌일지. 나에겐 이것이 은행생활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고, 지금도 가끔 헷갈린다. 물론, 은행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 명 한 명의 고객이 더 많은 상품을 가입, 이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고객에게도 '지금'은 마지못해 가입한 상품일지라도 '미래'에는 하길 잘 했다, 편하다, 라는 마음이 들 수 있기 때문에 마케팅의 성공은 중요하다.


 그런데도 왜 나는 은행의 KPI 점수 평가 방식과 내부적인 프로모션의 방향, 그러면서도 CS까지 잘 챙기려고 하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일까. 이건 나의 마케팅 능력의 부족함을 덮기 위한 핑계일지 모르나, 어쨌건 과거의 영업방식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은행에 많은 아쉬움이 있다. 다만 내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건, 그런 은행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아이디어 따위 깊게 고민해보지 않는 방만함이다. 고민을 하다가도, 6시면 꺼져버리는 PC 마감시간을 맞추기 위해 후다닥 마감을 하고 퇴근을 해버린다. 퇴근 후, 그리고 주말동안 회사에 대한 고민은 내겐 사치다.


 출근길에 비하면 퇴근길은 양반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길을 통과하여 여유있게 귀가한 나는, 향긋한 음식 냄새가 나는 부엌을 통과하여 아내와 굿이브닝 키스를 했다(엄머나!). 평소 음식 솜씨가 좋은 아내는 타고난 효율추구성 때문인지 후다닥 밥상을 차리는 때가 더 많았다. 근데 오늘은 온라인으로 주문한 식재료가 도착한 기념으로, 특별 메뉴를 준비해줬다. 


쌍라이트.. 가 아니고 쌍라이팬이다. 힘도 약한데 동시에 두 개를 하겠다고 낑낑댄 아내가 안쓰럽고 고맙다.


 부엌에서는 한창 토마토 소스 베이스의 스파게티가 조리되고 있었다. 하나는 해물, 다른 하나는 베이컨이 주 재료였다. 한 켠에서는 기성제품인 냉동피자가 오븐에서 따뜻하게 데워지는 중이었고, 나의 임무는 피자가 타지 않게 잘 데워지도록 체크하고 꺼내는 일이었다. 후다닥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합류한 나는 넘치는 음식 향기 속에서 황홀해했다. 더이상 기다릴 수 없어 아내를 재촉했다. 


"어서 먹자!"

"조금만 기다려."


 옆에 놓여있던 바나나를 집어들었다. 잘 익은 노란 바나나였다. 바나나가 너무 익으면 당도가 높아져서 좋지 않다고 들었다. 그래도 그냥 먹었다. 밥 먹고 과일을 먹는 것보단 나은 선택이니까. 바나나의 짙은 향 때문에 음식 만들기에 방해된다며 내가 권해준 바나나를 거절한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맛있게 바나나를 먹었다. 마치 본능에 충실한 침팬지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몇 분이 더 지나고, 피자도 완성(이라기엔 그냥 데웠지만)됐고 아내가 심혈을 기울인 스파게티 2인분도 완성이 됐다. 거기에다 화룡점정으로 역시나 직접 만든 피칸 파이까지.. 오늘 무슨 날입니까? (아니었다)


 

좌베이컨, 우해물 스파게티(with 토마토 소스 from 이탈리아). 진심으로 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맛있다.
예전엔 마트에서 파는 저 피자(좌)가 메인 수준이었는데, 오늘은 에피타이저로 전락했다. 배불렀지만 마지막에 맛보기로 먹은 피칸 파이(우)는, 당장 내다팔아도 될 맛이었다. 레알.


 사실, 아내가 그냥 혼자 레시피 보고 한 것은 아니었다. 휴직 중에 계속 집에 있으니 심심해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원데이클래스처럼 하루에 음식 하나 알려주는 클래스를 수강했는데, 거기서 배워와서 이렇게 맛나게 만들어낸 것이다. 음, 확실히 재능이 있다. 그렇다고 당장 식당 차리라고 할 만큼 만만한 업계가 아니지만, 진짜 할 마음이 있다면 해보라고 밀어줄 정도는 된다. 본인이 의지가 없어서 그렇지만. ㅎㅎ


 오늘의 저녁 식사는 대 성공이었다. 밀가루 위주였던 건 아쉽지만, 가끔 특식으로 먹기엔 정말 최고의 메뉴였다. 전혀 느끼하지 않고,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최상의 맛. 양이 좀 적고 점심 메뉴였다면 식사 후 커피 한 잔 곁들이면서 피칸 파이까지 먹었을텐데 그게 조금 아쉬웠다. 


 식사가 끝난 후 앉아있으면 소가 된다는 옛 성현의 말씀(?)에 따라, 바로 설거지에 돌입했다. 아내가 차려준 밥상의 뒤안길을 돌아보며 이렇게 많은 노고와 장비가 뒤따랐음을 다시 한번 깨닫고, 숙연하게 수세미를 비벼댔다. 아내가 복직하면, 이런 식사도 하기 쉽지 않을텐데.. "그냥 나 혼자 열심히 벌테니 때려칠려..?" (퍽)


이렇게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자! 관짝 박싱하는 그날까지!


항공샷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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