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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 네시 Aug 01. 2020

시키면 안 해. 내키면 할 거야.

나는야 청개구리

 이사를 했다. 여름에 이사라니, 때도 참 별로지만 설상가상으로 이삿날에 비가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함께 가구도, 내 마음도 젖어들었다, 는 건 오바고 그냥 설레는 마음으로 이삿짐을 정리했다. 2년만에 하는 이사라 그렇게 어색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작은 항상 두근거린다.


 시작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내 성격상 준비는 많이 하지 않는다. 아내가 많은 신경을 썼고, 나는 옆에서 거드는 일에 집중했다. 다만 큰 문제가 있었다. 집을 판 매도인이 본인의 사정으로 인해 우리가 새롭게 도배하고 청소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분양 받은지 3년밖에 안 된 비교적 새 집이었지만 군데군데 까진 곳도 보였고 무엇보다 벽지 디자인이 올드해서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터라 도배가 필요했다. 하지만 매도인은 냉정하다 못해 이기적이었다. 우리에게 계속해서 추가 중도금을 요구하기만 할 뿐(본인이 이사가는 집을 인테리어 할 비용이 필요하다며) 우리의 사정(다른 것도 아니고 도배하고 입주청소할 시간을 하루 달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태도에 우린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고(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지만), 정말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이삿짐 들어오기 직전에 후딱 입주청소만 끝내고 이사를 마쳤다. 비도 오고,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도배도 새로 하지 못한 탓에 이사를 왔음에도 그리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위치에 우리 집을 마련했다는 성취감에 우리 부부는 희망찬 내일을 그리며 새 터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는 도배에 큰 관심이 없었으나, 이사하고 난 지 시간이 조금 지나자 도배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됐다. 인테리어에 비교적 민감한 아내는 올드한 안방 벽지와 밋밋한 거실, 전체적으로 너무 밝은 톤의 집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래서 의견을 조율한 끝에 전체 도배를 하기로 했고, 거실과 안방, TV방, 내 방(아직 꾸미지 못했지만)의 한쪽 벽에 포인트 색깔을 넣기로 결정했다. 물론 대부분의 인테리어 샘플은 아내가 찾아서 공유했고, 나는 그녀의 최종 결정에 관여했다. 업체를 알아보고, 견적을 내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이사를 하면서 도배를 하면 편했겠지만, 사정상 어쩔 수 없던 우리는 거주 중 도배를 하게 됐다. 하루는 집의 한쪽 켠에 짐을 몰아두고 다른 한쪽을 도배하고, 이틀 째엔 짐을 옮긴 뒤 반대쪽을 도배하는 식이었다. 살림이 적은 2인 가구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노련해보이는 도배 사장님에게 일을 맡겨두고 우리는 짐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구석에 잘 숨겨놓고 또 비닐로 덮는 등 사전 작업을 끝마쳤다. 그런데, 또 비가 온다.. 후..


 이삿날도 그랬지만 도배하는 이틀(실제론 3일을 했다. 변수가 생겨서)동안에도 계속 비가 왔다. 처음에는 또 비가 내리자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생각보다 도배에 지장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실내가 덥지 않아 작업하기에 수월했다. 우리 부부는 빠른 정리를 위해 도배가 끝난 장소에 들어가서 바로 청소를 시작했는데, 비가 와준 덕에 쓰레기, 먼지 등과 더불어 더위와 싸우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소중한 휴가를 온전히 집안 청소에 투자하게 된 나는 강렬한 의지로 두 손엔 걸레를 들고 현장에 걸어들어갔다.


https://youtu.be/iOQq6zTQRuA

집청소하는 모습을 타임랩스 기능으로 찍어봤다. 그냥 두기 아까워 영상으로 만들었더니, 보고 있으면 잠이 솔솔 온다.


 첫날엔 욕실 타일 수리까지 하느라 집안이 정말 엉망이라 청소를 못했고, 이튿날부터 시작된 나의 걸레질은 2일간 불타올랐다. 이사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곳곳에 미처 치우지 못한(걸레질 하지 못한) 흔적이 남아있지만, 도배가 진행되는 어수선한 집에서 2일동안 95% 이상 닦아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렇게 구석구석 열심히 걸레질을 하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평소에는 그렇게 게으르던 내가, 분리수거 한 번 스스로 먼저 하러 가지 않고 청소기 한 번 돌리지 않던 내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구석구석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네. 무슨 바람이 든 거지?'


 손으로는 창문에 묻은 도배 풀을 열심히 닦아 내면서도 내 머릿속에 든 의문은 떠나질 않았다. 청소 못해 죽은 귀신이 씌었나, 혼자 중얼거리던 나를 아내가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내가 봐도 신기한데, 아내는 오죽할까 싶었다. 자기계발 한답시고 부지런히 살기 시작한 나였어도, 집안일에는 여전히 게을렀다. 최근 휴직 중이었던 아내가 집에 있을 때는 그렇다 치고, 같이 직장생활을 할 때도 집안일의 분담비율은 거의 9:1 정도로 아내의 비중이 높았다. 나는 그저 집에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남편이었다.


 그 때는 아내가 무언가를 시키는 건 커녕 부탁만 해도 짜증이 났다. 한 마디로 성격이 이상한 놈이었다. 같이 살면서 생기는 일과 부스러기들인데 나는 그걸 처리하는 게 그리도 싫었다. '알았다'고 대답은 해놓고 한참을 꿈쩍대지 않으니 아내는 한숨을 쉬며 소비했던 체력을 또다시 소진하곤 했다. 그래서 아픈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갑자기 또 미안해진다..)


 별 것 아닌 일이더라도 누가 시키면 하기 싫은 게 사람 속이라던데, 내가 딱 그랬다.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하기 싫은 건 하기 싫은 거였다. 어렸을 때부터 말 안들을 때마다 듣던 '청개구리'가 생각났다. 집 앞 작은 분수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오늘따라 왠지 더 정겹다. 울지 말라고 하면 시끄럽게 울고, 듣고 싶을 땐 조용한 개구리들이 야속했는데, 오늘은 동질감이 느껴진다.


 아내에게 이야기 해야겠다. 날 움직이게 하고 싶으면, '그냥 쉬어'라고 말하라고. 그러는 편이 '이거 해줘'라고 하는 것보다 성공률이 높을 것 같다고.


 그리고 내게 말해달라. '저리 가' 라고. 그럼 더 격렬하게 다가갈 테니. 에헴, 오늘은 이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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