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하얀 불길
물길이 트인 후, 마을의 시간은 잠시 동안 기묘한 평온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화해나 이해에서 비롯된 평온이 아니었다. 차라리, 난생 처음 보는 기계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려는 아이의 그것과 같은, 호기심 어린 침묵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임피제의 행동을 비웃거나 조롱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멀찍이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집요한 시선으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그는 여전히 ‘코가 큰 이양인’이었지만, 이제 ‘무해한 미치광이’가 아니라 ‘무엇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미지수’가 되었다. 마치 조용한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그가 일으킨 파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임피제 자신은 그 작은 성공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물은 그저 흘러야 할 곳으로 흘렀을 뿐이다. 그는 다시 자신의 단조로운 일과로 돌아왔다.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고, 낡은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렸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너머로 아득하게 들려오는 재즈 연주는, 이 고립된 섬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 델로니어스 몽크의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피아노 선율은, 이 섬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의 질서를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그 음악 속에서 이상한 위안을 얻었다.
그의 내면에서 시작된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 물의 흐름이라는 하나의 퍼즐 조각을 맞추자, 그 옆의 또 다른 비어 있는 공간, ‘생산성을 가진 돼지’의 부재라는 근원적인 공백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물길이 막힌 땅처럼, 이 섬의 생명력 역시 어딘가에서 정체되어 순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잘 자라고 새끼를 많이 낳는 돼지가 그 순환을 다시 시작하게 할 수 있는, 잃어버린 톱니바퀴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하나의 강박이었다. 논리적인 귀결이라기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집요한 충동. 그는 이 충동의 근원을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미군 부대의 보급 장교인 앤더슨 대령과 연락을 취했다.
며칠 후, 먼지를 풀풀 날리는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부대로 향한 임피제는 위스키를 좋아하는, 유쾌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앤더슨과 마주 앉았다. 시가와 가죽 냄새가 배어 있는 그의 사무실은 한림의 풍경과는 다른 시간대가 흐르는, 별개의 행성처럼 느껴졌다.
“오셨군요, 신부님.” 앤더슨은 얼음을 채운 잔을 흔들며 말했다. 그의 눈은 지극히 합리적인 사람이 던지는 그런 종류의 질문을 담고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재미있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혹시 하늘에 사다리라도 놓으시렵니까?”
“그보다 좀 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임피제는 위스키 잔을 받아 들었다.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돼지가 필요합니다.”
“돼지요?” 앤더슨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지난번에 그 말씀을 하셨죠. 아직도 돼지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저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이 섬의 돼지들은…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더디게 자라고, 새끼도 많이 낳지 못해요.”
“흐음, 시간이 멈췄다라….” 앤더슨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신부님은 보통 ‘가난해서 안타깝다’고들 하던데. 표현 방식이 독특하시군요.”
“가난은 결과일 뿐이죠. 과정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저는 그 과정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철학적이시군요.” 앤더슨은 웃었다. “좋습니다. 마침 육지에서 들여온 놈들이 몇 마리 있습니다. 요크셔 종인데, 아주 실하죠. 빨리 자라고 새끼도 많이 칩니다. 다만….”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그놈들은 온몸이 눈처럼 새하얗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그 질문의 의미를 임피제는 그때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든, 검든, 혹은 무지개 색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 그 텅 빈 공간을 채울 실체 그 자체였으니까.
두 마리의 하얀 돼지가 한림항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1955년의 가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무 울타리에 갇힌 돼지들이 군용 트럭에서 내려지는 순간, 부두의 공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그물을 손질하던 어부들도, 생선을 팔던 아낙들도, 짐을 나르던 인부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그 기이한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돼지가 아니었다.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그랬다. 온몸이 이질적일 정도로 새하얀 털로 뒤덮인 그 생명체는, 이 섬의 검고 거친 풍경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다. 마치 검은 벨벳 위에 떨어진 두 방울의 우유처럼, 그들의 존재는 너무나 선명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섬에서 ‘흰색’은 산 자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의(祭儀)의 색이자, 죽음의 색이었으며, 때로는 신성(神聖)의 색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일상의 공간에 함부로 들여놓을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세상에, 저게 뭐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여. 허연 돼지라니….”
수군거림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갔다. 신당을 지키는 변씨 노인은 멀찍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지팡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눈에는 하얀 돼지가 아니라, 마을에 닥칠 재앙의 전조가 보였다. “내가 뭐랬어. 저 코쟁이가 결국 사달을 낼 거라고 했지. 저건 돼지가 아니여. 마을의 복을 다 빨아먹을 허연 살(煞)이여, 살!” 그의 외침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임피제는 사람들의 공포 어린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며 묵묵히 돼지를 자신의 임시 거처 옆에 급히 만든 우리 안으로 몰아넣었다. 돼지들은 영문도 모른 채 낯선 환경에 내려서서, 꿀꿀거리며 짧은 꼬리를 흔들었다. 그 천진한 모습이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더욱 증폭시켰다. 도랑 파기로 얻었던 기묘한 존중은 하얀 돼지의 등장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이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수’가 아니라, ‘재앙을 불러온 명백한 원인 제공자’가 되었다.
그는 곧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혼자였다. 이 기묘한 실험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 섬의 논리를 거슬러 기꺼이 ‘허연 살’을 자신의 삶 안으로 들여놓을 또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마을의 집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매실. 4.3 때 남편을 잃고, 다섯 아이를 홀로 키우는 과부. 그녀는 마을의 누구와도 깊이 섞이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고, 그녀 자신은 섬이 되어버린 여자였다. 그녀의 침묵은 다른 사람들의 침묵과 종류가 달랐다. 그것은 체념이나 순응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마지막 남은 저항처럼 보였다. 그녀의 눈은 깊고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작은 불씨가 남아있음을 임피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잃을 것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때로는 가장 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며칠 후, 임피제는 결심을 굳히고 강매실의 집으로 향했다.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집은 유난히 더 스산해 보였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닫힌 사립문 앞에 섰다. 잠시 후,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강매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아무 말 없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기계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임피제는 어색하게 입을 열고,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 한구석에는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다가 낯선 이의 등장에 놀라 어미 닭의 날개 아래로 숨는 병아리들처럼 우르르 방 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숨을 한번 고르고, 본론을 꺼냈다.
“돼지를… 키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강매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미친놈’을 보는 그것과 같았다.
“제가 돼지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아주 빨리 자라고, 새끼도 많이 낳는 놈들입니다. 한 마리를 드릴 테니, 키워보십시오. 돈을 받으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이 거래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설명했다. 그것은 그가 며칠 밤낮으로 고민하여 만들어낸, 이 섬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방식의 약속이었다.
“그 돼지가 새끼를 낳으면, 그중 가장 튼튼한 놈으로 두 마리만 저에게 돌려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모두 부인의 것입니다.”
강매실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표정의 변화가 일었다. 세상에 없는 종류의 약속. 일방적인 시혜가 아닌, 알 수 없는 형태의 교환. 그것은 그녀가 평생을 살아온 세계의 문법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왜… 저입니까?” 한참 만에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는 오래 사용하지 않은 기계처럼 거칠었다.
임피제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아무도 이 돼지를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리고… 부인이라면 잘 키워낼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 말은 즉흥적으로 나온 것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녀의 거친 손과 다문 입술, 그리고 깊은 눈 속에서 그는 꺾이지 않는 생명력을 보았다.
강매실은 대답 없이 방 안 구석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한번 쳐다보았다. 아이들의 배는 늘 굶주려 있었다. 보리개떡 하나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아이들의 굶주림 사이에서 벌이는 처절한 저울질이었다. 허연 살이라는 저주와, 새끼 돼지라는 실낱같은 희망 사이의 싸움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임피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 돼지, 보겠습니다.”
그날 오후, 마을 전체가 숨을 죽였다. 과부 강매실이, 그 푸른 눈의 신부를 따라 그의 거처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밧줄로 허연 돼지의 목을 묶고, 마을 길을 가로질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돼지는 낯선 길 위에서 버티며 꽥꽥 소리를 질러댔고, 강매실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 밧줄을 끌었다. 그녀의 등 뒤로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날아와 비수처럼 꽂혔다. 사람들은 그녀를 향해 침을 뱉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침보다 더 차갑고 모욕적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작은 집, 낡은 뒷간 옆에 급히 만든 우리 안에 하얀 돼지가 갇혔을 때, 다섯 아이들은 겁에 질린 눈으로 그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돼지는 낯선 곳이 불안한 듯, 계속해서 울타리를 들이받았다.
그날 밤, 강매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밖에서는 여전히 바람이 울고 있었고, 간간이 돼지의 불안한 꿀꿀거림이 들려왔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뜬 채 생각했다.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인 것인가. 우리 식구의 배를 채워줄 복덩이인가, 아니면 이 집안을 통째로 무너뜨릴 재앙인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섬의 그 누구도, 심지어 이 모든 일을 시작한 푸른 눈의 신부조차도, 그 답을 알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세계에, 그리고 돌처럼 침묵하던 이 섬에, 아주 작지만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얗고, 기묘하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그 돼지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