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중독자 가족 명심 10 계명

- 후회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나 밉다.

by 꽃샘추위

아빠는 시시때때로 내게 무거운 인생의 짐을 얹어준 채 하루하루 말라갔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빠가 죽고 나서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순전히 나 편하자고... 자식으로서의 임무를 그동안 충실히 하려 노력하며 살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언제 아빠가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고,

아빠의 뇌가 언제 제 기능을 다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순전히 아빠가 죽고 나서 내가 후회하지 않기 위한 노력들이었다.


아빠가 뇌경색에도 천운을 다해 두 발로 걸어 퇴원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처음으로 아빠와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몇 년에 한 번 꼴로 아빠를 만날까 말까 하는 여동생까지 부르고 내 아이들까지 대동하여 삼대가 처음으로 함께 하는 바다 여행이었다. 아빠는 그날 밤에도 숙소 아래 슈퍼에서 소주를 한 병을 사서 마셨지만 어쨌거나 아빠와 함께 거닐 던 비 내리던 속초의 밤바다, 휴휴암의 물고기 떼를 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상의 번뇌를 내려놓고 잠시 쉬라는 의미의 <휴휴암>처럼.. 나는 그저 아빠가 술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에 평안을 얻고 휴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빠는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 언제 시집을 갈 것 같냐고 물었었다. 아빠가 걸을 수 있을 때 식장에 서야 하지 않겠냐고.... 아빠도 내심 동생을 시집보내기 전에 본인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불안하셨던 거다.


/아빠와 함께 1박 2일 여행하기/ 아빠와 해외여행 가기/ 아빠와 시장 구경하기/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직접 만들어 드리기/ 아빠와 쇼핑하기/ 아빠와 가족사진 찍기/ 아빠랑 드라이브 하기/ 아빠와 분위기 좋은 카페 가기/ 아빠에게 용돈 드리기(술을 계속 사드시기 때문에 용돈 한 번 편히 드리지 못했다...)/ 아빠랑 극장 가서 영화보기/ 아빠랑 레일바이크 타기/ 아빠랑 등산하기/ 아빠에게 멋진 양복과 구두 선물하기/ 아빠가 우리 집에서 주무시기/ 아빠랑 동생 시집 잘 보내기........../ 아빠랑 술, 담배 걱정 없이 살아보기


최근 몇 년 간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며 아빠와 뜻하지 않게 꽤 많은 일들을 함께 하게 되었지만 버킷리스트에는 이룬 것보다 이루지 못한 것들이 더 많다.


중독자의 가족들은 환자의 변화에 따라 죄책감과, 분노, 불신과 원망, 자괴감, 우울, 불안감 등 참으로 다채롭고 복합적인 감정의 널뛰기를 함께 하게 되는 것 같다. 환자 본인의 삶을 넘어서 가족의 일상까지도 송두리째 흔드는 중독의 힘이란 참으로 무섭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정심을 찾고 환자를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지만 작은 주먹으로 아무리 두드려도 진동하나 전해지지 않는 수십 센티 두께의 강철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알코올 중독 커뮤니티에서 <중독자 가족 명심 10 계명>이란 글을 본 적이 있다.

알코올 전문 병원의 로비나 복도에도 많이 게시되어 있는 글이다.





중독자 가족 명심 10 계명

1. 중독도 병임을 인정하고, 이 병에 대해서 공부하라. 이 세상에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중독을 치료하고 싶으면 중독에 관한 책을 구입하여 공부하라.


2. 혼자 끙끙거리지 말고, 다른 중독 가족, 친척, 친구,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무시하지 말라. 뜻밖에도 여러분의 주위 사람들 중에 같은 고민과 해결의 경험을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3. 환자가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 최근에 음주로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 충고하라.

충고할 때에 흥분해서는 안되며, 협박하거나 흥정하지도 말고, 또 상처가 될말, 하고 나면 후회가 될 말, 비난조의 말은 하지 말라. 그리고 과거 이야기까지 또 꺼내서는 안 된다.


4. 중독자들의 생각은 아주 느리게 바뀌므로 실망하지 말고 지속적으로 격려해 주어라

중독 기간이 10년이었다면 회복도 10년 걸린다. 서두르지 말고 장기적인 계획으로 치료에 임하라.


5. 환자에게 "술 먹지 말라"는 말을 하지 말라. 환자는 이 말을 듣지도 않을뿐더러, 이 말 때문에 오히려 싸움만 일어난다. 대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자."는 말을 하라.


6. 환자가 음주로 인해 법적, 경제적인 문제를 일으켰다면, 이를 보호자들이 대신 해결해줘서는 안 된다.

환자 스스로가 책임지도록 하라. 환자는 사고 치고 보호자는 뒷감당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환자에게 나쁜 버릇만 심어줄 뿐이다.


7. 환자에게 한 잔도 주지 말라. 환자의 애걸에 보호자들이 술 한잔이나 한 병 정도를 허락하는 경우가 있는데 술 허락은 치료 포기와 마찬가지이다. 동정심은 술에 버금가는 독약이다.


8. 보호자도 단주하라. 술 없이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줘라.


9. 가족의 인생과 정신건강을 지켜라. 환자들은 누구누구 때문에 술을 마신다며 남 탓을 잘하는데, 가족들 역시 환자의 알코올 중독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을 망쳤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남 탓을 하는 것이다.

환자 때문에 내 인생이 불행해졌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가족들은 자신들의 인생과 정신건강을 챙겨야 하며, 이때 종교생활이 큰 도움이 된다.


10. 환자의 경제능력 상실에 대비하라. 많은 경우 환자는 직업을 잃게 되고, 가장 역할도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중독자의 가족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여 미래의 가정경제를 지금부터 대비하여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붕괴되지 않는다.


출처: 한국 알아넌 연합회ㅣ공지사항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

알코올 중독 커뮤니티 속 이 글에 달린 댓글에는 이렇게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냐? 이렇게 해봤지만 다 소용없더라. 죽어야 끝난 다는 회의적인 결말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원수인 것 같다가도 한편으로는 아빠를 이해하고 싶다.

아빠는 암만큼이나 완치가 어려운 지독한 질병에 걸린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로 살며 늘어만 가는 뱃살을 빼기 위해,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서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최대한 자제하고 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밀가루를 끊는 것은, 세상 맛있어 보이는 빵과 라면, 과자를 눈앞에 두고 참기란 참으로 힘들다는 걸 체감하면서 아빠가 떠올랐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먹으며 앞 테이블에 놓인 초록 소주병에 갈망의 눈빛을 떼지 못했던 아빠를, 아빠의 힘듦을 조금은 헤아려보자.


하... 하지만 그러기엔 아빠가 너무 밉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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