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샘추위 Dec 07. 2021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17 참고 인내하는 게 습관이 되어버린 삶이란?- 나 자신을 위한 기도

어릴 적부터 가난과 가정불화와 술이 빚어낸 어두움은

나도 모르게 나를 참고 인내하는 캄캄한 삶으로 인도해버렸나?

나도 모르게 참고 인내하는 게 습관이 됐다.


검은색 운동화에 구멍이 났다. 까만색 발등 엄지발가락쯤에 생긴 동그란 구멍.. 그 사이로 보이는 흰 양말의 선명한 대비 효과. 매직으로 양말을 색칠해볼까? 새 운동화가 필요하지만 매일 돈 꾸러 다니는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꾸룩꾸룩 배에서 난리가 났다. 화장실에 가고 싶지만 방과 방이 맞닿은 집. 내 방문을 열면 안방인 그곳. 안방을 통과해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가기가 두렵다. 안방은 지금 불화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으니 거길 통과하다간 그 불길이 나한테 옮겨 붙을까 두려워 아픈 배를 쥐어 잡고 참아본다.


할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열어본다. 알록달록 한 친구들의 반찬들 곁에 온통 빨간 물결인 내 반찬통을 열기가 부끄럽다. 오늘은 무엇이 들어있을까? 하지만 반찬투정은 하지 않으리.


어른이 되었다. 나도 돈을 벌기 시작했다. 사회초년생이 되었지만 당장 스스로 독립하는 게 급급한 월급쟁이는 편의점에 가서 좋아하는 과자, 음료수 하나 사 먹기에도 돈이 아까웠다.

커피우유며 큐브 치즈며 별의별 군것질거리를 잘 사 먹는 동생이 없는 돈에 앞 트임을 하고 이 교정을 한다고 했을 때에는 한심스럽게도 느껴졌다.(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동생이 나보다 더 자신을 잘 돌볼 줄 알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생기니, 나보다는 아이가 최우선이 됐다. 나보다는 일하는 남편 것이 먼저가 됐다. 치료할 이가 있어 치료를 받아야 하지만 이번 달엔 큰 아이 학원을 새로 등록했으니, 그다음 달에는 챙겨야 할 경조사가 많으니 내 치료를 미뤄본다.


알코올 중독자 아빠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날 흔들어댔다. 할머니, 할아버지 불쌍해서 어쩌나? 아빠를 어쩜 좋나? 죄책감에 두려움에 분노에 측은함에 까맣게 타버린 내 마음을 버무리다가 내 몸에도 머릿속에도 잔뜩 검댕이들이 묻어버렸다.

캄캄한 나, 캄캄한 인생이 되었다.

까맣게 타버린 가슴속에 따뜻한 물 한잔 넣어주지 못했고, 갈라진 발뒤꿈치에 로션 한번 바르지 못했고, 엉킨 머리에 빗질할 여유가 없었으며, 거울 속에 굳어가는 내 얼굴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끙끙 참고 인내하다가 불현듯 내가 또 왜 이렇고 있지? 생각을 해본다.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그러니 이제부터 내 삶에 1순위는 나여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며칠 전부터 아빠를 위해 기도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생각을 바꿔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해보기로 한다.


- 내가 많은 시련으로부터 안전하기를....

- 내가 행복하고 마음에 평온을 얻기를...

- 내가 건강하기를...





작가의 이전글 결혼해서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