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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추위 Jan 13. 2022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18 아빠는 1월 1일이 되기만을 기다렸을까- 알코올 중독자 아빠의 전화

이제 다시는 없을 2021년을 보내주고 새해 아침을 맞이했다.

해가 바뀌어 나이 한 살 더 먹게 된 아쉬움, 새해에는 뭔가 더 잘 살아내고 싶은 열정과 다짐과 설렘들이 가득하지만 새해가 된다는 건 그저 또 다른 평범한 아침을 만나는 일...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지만 평소와 똑같은 아침을 보내다 보면 새해의 감흥은 그렇게 일상 속에 평범하게 녹아들어 간다. 마치 새 신발을 신었을 때의 감흥이 며칠 신다 보면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평소와 같은 1월 1일..

아침을 먹으려는데 알코올 중독자 아빠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 <아빠>라는 이름을 보자마자 두근대는 심장을 달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저기.... 해도 바뀌고 했으니까 아빠가 사과할게. 딸!... 미안해"


"또 술 드시고 전화하셨어요?"


"아니야..."


다 죽어가는 기운 없는 목소리와 어눌한 발음은 전화로 들어서는 술을 마신 건지, 맨 정신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일단 혀가 꼬부라지지 않은 건 확실하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기로 했다.

이미 몇 달 전 수신거부를 해제해놓았을 때의 그 마음가짐 그대로... 내가 아빠를 마주해야 할 순간이 왔다.


"아빠 사과... 받아주는 거지... 응?


나는 사과를 하는 연인에게 '그래서 네가 생각하는 네 잘못은 뭔데?' '네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게 너의 잘못이야' 하고 따져 묻듯이 어떤 걸 사과할 건지 말해보라며 꼰대 짓을 했다.

"무슨 사과..? 어떤 걸 사과하려는지 얘기를 해야 알지?"


아빠는 특유의 얼렁뚱땅을 시전 하며....


"좌우지간에... 아빠가 지난해에는... 이것저것 잘못했으니 사과를 받아주고..... 이해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 올해는 네 얼굴도 좀 보여주고, 우리 강아지들도 좀 보고...."


"나한테는 아빠가 없는 줄 알았는데요.."


"응... 그랬어? 네가 많이... 아팠구나."


"한 해 아프고 끝나는 게 아니라 1년이고 2년이고.. 10년이 지나도 이 고통이 끝나지 않아서 저는 너무 괴로운데요. 가족끼리 주고받는 상처가 끝나지 않는 아픔이 된다면 그냥 안 만나고 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왜 안 만나... 이젠 그럴 일 없어... 상처줄일 없어... 식구끼리 보듬어주고 안아주고 사랑해주면 되는 거지"


"내가 그 말을 아빠한테 평생 들었다면? 매일 그 말을 믿고 내 마음을 다잡고 노력했는데도 아빠가 변하지 않았는데... 너무 한 거 아니에요? 내가 40살이 넘도록 평생을? 마음이 너무 아프고 힘든데 그 마음이 짓이겨지도록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더라고.."


"좌우지간에.... 앞으로는 잘 지내고... 마음 아파도 이제는 건강도 좀 챙기고 즐거운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아빠는 지난여름에도 사과를 한다고는 술을 잔뜩 마시고 나한테 열몇 번을 전화하셨더라고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술 먹고 전화하지 마세요. 다시 나한테 아빠 소리 하려거든 아빠처럼 행동하시면 돼요. 나한테 아빠가 있다는 믿음을 주시면 나도 아빠 찾아가서 아빠 얼굴도 보고, 아빠랑 밥도 먹을 수 있어."


"그래... 알았다... 네 얘기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아빠 사과는 받을게요. 먼저 전화해 줘서 고마워요"


".... 그래.. 고맙구나.

딸.... 사랑해."


"아빠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는 나한테도 이런 아빠가 있었구나! 하고 놀라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래..."


전화통화를 끝내고 가만히 생각해본다.

.........


아빠는 나에게 사과하기 위해 1월 1일이 되기만을 기다린 걸까?


나한테 뭐라고 사과의 말을 꺼내면 좋을지 수십 번, 수백 번 고민하고 고뇌했을 아빠의 수많은 외로운 밤들을 상상해본다.

새해라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아빠는 알까?

새해의 다짐은 때 타 버린 새 신발처럼 금방 헌신발이 된다는 걸....

아빠의 하루도, 아빠의 다짐도 조심조심 매만지다가 어느 순간 구겨지고 망가지다가 어느 순간엔 내던져지고 말 거라는 걸...


통화 내내 아빠는 내게 술 끊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도 아빠한테 더 이상 술 좀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빠와 나.. 그 다짐이 금방 흔들릴 거란 걸 알고 있는게 틀림없다.


다짐쯤이야 흔들려도 좋으니..

그저 아빠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아빠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고 보듬어주지 않으면 그 누구도 아빠의 인생을 구원해줄 수 없음을....

아빠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찰나의 순간이 모여 행복이 되는 것처럼..

평범한 아침을 만나고 최선을 다해 하루를 보내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 나에게 좋은 한 해를 선물하고 더 좋은 인생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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