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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샘추위 Feb 18. 2022

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19 허름한 그 집에 세 식구가 산다.- 재회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그 소리가 정말 좋았다.

유리 굴러가듯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던 시냇물이 메워졌다.

막걸리 심부름을 하고 한 손에는 막걸리, 다른 손에는 남은 동전을 꼭 쥐고 이 동전이 내 것이 될까? 설레는 발걸음을 옮겼던 그 길은 사라졌다.

집집마다 대추나무, 감나무, 뽕나무... 귀여운 꼬마 사과까지 달려있던 그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아파트가 우뚝 솟았다.

담장 위에 고양이, 저마다 다른 소리를 뽐내던 개 짖는 소리도 거의 사라졌다

굽이 굽이 산길을 따라 들어가면 병으로 주인을 잃은 폐가를 지나 저기 저 멀리 산 밑에 하얀 구름을 뿜어대는 허름한 집이 보인다.

바로 턱 아래까지 재개발이 시작되어 산을 파헤치고 길을 정비하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이곳은 20년을 훌쩍 넘도록 그대로이고 허름한 그 집에는 세 식구가 산다.

팔순을 넘긴 할아버지와 대장암 투병 중인 할머니와 알코올 중독자 나의 아빠다.


집으로 들어가는 논두렁 옆 길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한다.

그들을 보러 가는 것은 거의 2년 만인 것 같다.

이 길을 지나면 나는 커다란 파도에 흠뻑 젖을 것을 알기에 무척이나 두렵다.

이 길의 끝에 내 인생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흠뻑 젖을 각오를 하고 가던 길을 가본다.


처음 본 나를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와

마당 한편에 지붕 키만큼 쌓인 공사장 팔레트와 (화목 난로를 위한 땔감이다)

여전히 허물어지기 직전인 담벼락이 보인다.


인기척에 나오신 할아버지를 보니 굳어있던 마음은 풀어지고 작은 어깨를 얼른 안아드리며, "보고 싶어서 왔어요."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몇 번을 거듭된 재건수술의 무용담을 남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풀어내는 할머니와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갔던 날 갑자기 비는 내렸고 집으로 가는 길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경찰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할아버지와 땔감 한 번 팰 줄 몰라 팔순의 아버지가 수십 번 수백 번 내려찍어 자르고 옮긴 땔감으로 불 피운 방에서 그저 술, 담배만 할 줄 아는 나의 아버지가 계셨다.


아니 아빠는 어딜 놀러 갔는지 언제 나가고 없다고 했다.

아빠를 마주할 일이 걱정이었는데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마지막 수술은 아직까지는 잘 되었다고 하셨고 경찰과 함께 귀가하셨던 할아버지는 치매검사를 하게 되면서 뇌경색을 발견하여 천만다행이라고 하셨다.

아빠 때문에 항상 돈을 숨겨놓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느 날 할아버지 지갑에 손을 대고 있는 아빠를 보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돈이 필요하면 얘기를 하면 되지 왜 남에 지갑에 몰래 손을 대느냐고 하셨다는데....

영화나 드라마 속에 건달이나 불한당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온 아빠는 마당에 세워진 딸의 차를 알아본 건지 못 알아본 건지, 자식 앞에 설 자신이 없었는지 본채를 지나 슬그머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담배냄새로 가득한 깜깜한 방문을 열어 빨갛게 난로를 피우고 잔뜩 구부려 잠든 아빠의 모습만 보고는 돌아왔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손녀에게 고구마며 밤이며 무엇이든 손에 들려 보내고 싶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이었던 손녀에게 김치뿐인 도시락만 싸줘서 미안했던 슬프고도 아픈 마음을 마주한다.

땔감 한 번 팰 줄 모르고, 백 원짜리, 천 원짜리 꼬깃꼬깃 부모의 쌈짓돈을 훔쳐 술과 담배를 사 먹는 철부지 건달 같은 아빠의 행실에 탄식한다.


논과 밭과 그 허름한 집마저 허물어지고 마을 깊숙이까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마을의 예전 모습이 모두 사라질 때쯤이면 그때, 이 세 식구는 어떻게 될까?

큰 파도가 쉴 새 없이 부딪히는 그 길에 끝, 내 인생은 과연 어떻게 될까?


                                                                                                                                                           202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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