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알코올중독자의 딸입니다.
39 두 번째 면담을 다녀왔습니다
아빠가 입원을 한 지 282일째 되는 날이었다
제대로 된 첫눈이 내리던 날, 아빠가 입원해계신 정신병원 주치의와 두 번째 면담을 미리 예약해두고 병원을 찾았다. 두 번째 면담이라 의사와 나는 꽤 친근해진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현재 아빠의 상태가 어떤지 여쭤보고 요양병원을 알아보다 중단한 이야기를 해볼 참이었다. 술을 안 마신 기간이 길어지면서 최근 들어 인지 상태가 또렷해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가을 요양 등급 판정을 받은 건 아주 잘 한일이라면서.... 지금은 그때보다 상태가 호전되어 지금 상태라면 등급이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고.
써먹어보지도 못한 요양 등급이지만 의사와 첫 번째 면담을 마친 후 부지런히 다니며 준비했던 시간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인지 상태가 아무리 또렷해졌어도 정상은 아니며 이미 거쳐간 뇌경색 때문에 뇌의 일정 부분이 망가져 충동적인 것은 하나의 성격처럼 앞으로 계속 가져가야 하는 증상이라고 의사는 덧붙였다.
본인의 의지와 마음에 맞지 않는 상황이 오면 불같이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고 왜소한 몸뚱어리로도 쾅쾅 뭔가를 걷어차며 한껏 불만을 토로한다고 했다. 평소 내성적이고 표현하기에 서툰 아빠가 그런다 하니 병원이 내 집처럼 익숙해진 건지 할머니나 나에게 철부지 소년처럼 짜증과 불평불만을 퍼붓던 모습을 기억해 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수긍이 되었다. 다른 환자들에 비해 적응을 하는데 꽤 긴 시간을 들이고 있다 하니 아빠는 분명 모범 환자는 아닐 거다. 의사가 에둘러 표현했겠지만 얼마나 낯부끄러운 행동으로 의료진을 당황케 하실지 보호자로서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순간이었다
걱정하던 요양 시설 입소에 대해 물으니 알코올 중독이라고 얘기하면 입소가 힘들 거라 한다. 역시 입소 문의 전화 3번 만에 내가 느낀 거절의 메시지가 확신으로 다가왔다. 의사는 본인은 요양 시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이미 첫 번째 면담에서 의사의 단호함을 느꼈기 때문에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당연한 일인데 인정에 끌려다니며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의 나는 그 단호함과 카리스마에 반해버렸다.)
굳이 요양 시설을 찾아보려면 작은 소도시의 신설기관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더해주시긴 하셨다.
3월 초까지 연장된 입원 기간은 지금의 호전반응을 볼 때 더 연장되기는 힘들 것이며 퇴원을 할 땐 가장 단호한 보호자 한 명이(내가 되겠지만...) 퇴원 후 다시 술을 마실 시에는 다시 입원을 하겠다는 각서를 받아둘 것을 추천한다고 했다. 개중에는 입원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술을 안 마시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1년여의 시간이 아빠에게 가능한 지긋지긋한 기억으로 남길 바라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언제든 다시 술을 마시더라도 내과적인 문제가 심해지기 전에 최대한 빨리 다시 병원에 모시고 오는 것이라 했다. 내과적인 문제들이 심각해지면 요양 시설, 정신병원 모두 입원이 불가하고 입원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대학병원뿐이니 그런 상황이 오도록 방치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뇌와 심장 쪽에 문제가 있고 현재도 비뇨기과, 내과, 정형외과 등 먹고 있는 약이 많으니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 아빠의 경우는 아주 위험해질 거라고...
기력이 쇠하고 시설 입소가 그나마 편해질 연세가 되기까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의사는 3월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았다고 했지만, 나는 한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하다
지금부터 차분히 아빠의 퇴원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지난여름 동생의 결혼식 사진을 새로 산 다이어리 사이에 곱게 끼워 넣어 아빠에게 전달을 부탁했다.
의사와의 면담을 하러 가기 전 아침 아빠에게 몇 마디 적어 보내고 싶었는데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잘 지내시냐고 물을 수도 잘 지내라고 할 수도, 눈물로 호소할 수도, 원망을 담은 글을 쓸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빠에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고.
이제는 아빠의 건강을 보살피셔야 한다고.
누구보다 아빠의 평안을 빈다고. 몇 자 적었다.
딸의 결혼식을 사진으로 보게 된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금도 여전히 아빠로부터 수신 거부된 전화가 오지만 전화는 받지 않는다.
아빠의 입원이 허락된 시간만큼 나는 충분히 휴식하고 나 자신을 돌보기로 한다. 그래야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