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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ldhail Oct 30. 2020

서른여덟 개의 별과 판잣집

생각보다 가까운 곳의 이야기

<서른여덟 개의 별과 판잣집>

 '유기동물 보호소'의 경계는 애매하다. 천의 경계선을 따라 이리저리 누벼진 스님의 옷처럼, 보호소의 생명들도 누벼진 공간에서, 누벼진 집을 짓고 살아간다. 실제로도 겨우 세상에 누벼져 있다.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위치한 하계역에서 1141번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가면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104 마을이 있다*.(*백사 또는 104 마을은 중계동 104번지라는 주소에서 유래되었다.) 1960년대쯤 생긴 이 곳에는 당시 시대상을 알려주는 벽화가 담벼락마다 그려져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길거리의 모습과는 다르게 벽화에 그려진 1960년대의 104 마을은 아주 생동감 넘쳤다. 지금도 여전히 쓸쓸하지만, 그 당시에는 쓸쓸함을 견뎌낼 낭만이 있었으리라. 달동네라는 이름의 여러 유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달이 잘 보이는 동네라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다. 힘든 삶 속에서도 나아질 미래를 그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비탈길을 따라 달동네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개 짖는 소리가 보호소로 나를 안내해준다.

대사님 한 분과, 보살님 한 분. 그리고 19마리의 강아지가 살고 있는 이 곳의 이름은 '묘법 연화사'다.

내가 이 곳에 처음 온 것은 2017년 겨울이었다. 당시 이 곳은 서울에 떠있는 쓰레기 섬 같았다. 위태위태한 절벽 위에서 유기견들이 천진하게 뛰어놀고 있었는데,  비 한 번이면 모든 것이 쓸려내려 갈 것만 같았다. 바닥이라고 부를만한 좁디좁은 공간에는 쓰레기와 연탄, 유기견들의 분변과 털이 뒹굴고 있었다. 봉사자들과 함께 주변 판잣집에서 잔해를 가져다가 절벽의 가장자리를 채워 넣고 플라스틱 봉과 철근으로 임시 울타리를 지어두었고, 2018, 2019년에 거쳐 컨테이너 시설과 철근 펜스를 설치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묘법 연화사가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운영되기 시작한 시점은 2005년부터로, 보살님께서 우연한 기회로 대사님과 유기견 친구들을 만나게 되신 때가 이때이다. 당시 50~60마리 정도 되었던 유기견들 중 몇은 나이 들어 죽고 몇은 다른 보호소에 보내준다고 구청에서 데리고 가버렸다고 한다. 이후에 온 강아지들 대부분은 노원구의 유기견으로, 길에서 대사님을 만나 '폐지 줍기'수행에 따라다니다가 이 곳까지 오게 되었다. 덕분에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를 몰라 대사님과 보살님이 이름을 하나씩 짓고 보듬어 주신다. 2013년에는 화재가 한 번 나서, 묘법 연화사가 전소되었는데 이때도 많은 생명이 죽었고 심지어 대사님과 보살님 마저도 죽을 위기를 넘기셨다. 지금은 그 숫자가 많이 줄어 엊그제 태어난 생명을 포함해 19마리인데, 보살님께서는 죽은 강아지들의 이름까지 노래로 만들어 혼자 심심하실 때 외우곤 하신다.


묘법 연화사는, 내가 처음 왔던 2017년 당시에 몇몇 동물권 단체들의 관심을 받다가 현재는 도움의 손길이 거의 끊긴 상태로 운영되고 있다. 다행히도 매일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대사님의 '폐지 줍기' 수행이 있어 묘법 연화사가 조금씩이나마 운영되고, 유기견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살님과 보내고 있다. 한편에 마련된 3평 남짓한 방은 이 보호소에서 거의 유일하게 따뜻한 공간이다.

법경이 펼쳐진 작은 책상과 개어진 이불 그리고 냉장고와 개수대가 전부인 이 방에서 두 분이 살고 계시다.

방 안 이곳저곳에는 여러 기업들로부터의 후원 자국이 가득하다. 최근에는 여러 기업에서 '샴푸'와 '사료', '간식'을 기부하고 갔다고 하시지만, 스물하나의 생명이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마침, 어느 간식 회사로부터 온 작은 육포가 껍질도 뜯어지지 않은 채, 열아홉 강아지들의 쟁탈 대상이 되어 있었다. 같은 회사의 로고가 그려진 박스는 여기저기 뒹굴고 있지만, 모든 생명이 먹기에는 충분하지 않은가 보다.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나에게 여러 기업에서 연락이 온다. 후원하거나 봉사할 보호소를 찾아주지 않겠느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들의 마케팅용으로 보호소가 쓰일까 봐 선뜻 알려주기가 겁이 난다. 사실, 많은 단체들이 이 곳에 관심을 가졌다가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주지 않은 것은 이 곳이 사람들의 이목을 충분히 끌지 못해서다. 물론 기업의 사회환원 활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단지 기부 대상에 있어서도 빈익빈 부익부가 존재하는 사회환원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고, 기부가 형식적으로 그쳐지는 데에 대한 끓어오름이 있는 것이다. 도움이 더 필요한 곳은, 당연히 더 어렵다. 더 어렵기 때문에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당연히 그렇다. 그렇기에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찾아보아야 한다. 찾아보았다면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움을 주지 않을 것이라면, 흔하디 흔한 홍보용으로는 쓰지 말아야 한다. 도와줄 거라는 약속을 했던 동물단체들의 손길이 없었을 때 보호소 관리자들의 절망감은 생각을 해보았느냐는 말이다. 도와주지 않을 거면 거짓말이라도 하지 말자. 그리고 도와줄 것이라면, 돕자. 제대로. 몇백 마리가 밥을 못 먹고 굶고 있는 사설 보호소가 허다하다. 그런 보호소에 간식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건가. 한 겨울,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보호소 앞에 물을 가져다가 놓으면 보호소는 어떻게 마셔야 하는가. 사료는 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을 보호소의 소비량도 생각하지 않은 채, 가져다 맡기기 식으로 기부를 하는가.

묘법 연화사에 나뒹구는 기부물품들을 보다가, 나까지 자연스레 죄송스러워져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보살님은 아는 듯 모르는 듯,  그래도 진정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이 밝다고 말씀하셨다.

강아지들도-물론 모든 친구들이 간식은 먹지는 못했지만-씩씩하게 꼬리를 흔들며 보살님을 보고 있었다. 


연못에 피어난 흰 연꽃**(**묘법 연화사의 '연화') 같은 이 보호소에서는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누빔 옷이 되어 세상의 추위를 막아주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보호소 밖으로 나오니 18시가 조금 넘었을 텐데도 세상이 어두워져 있었다. 낮에 보았던 판자촌의 누빔 자국은 이제 보이지 않았고 낮은 곳과 높은 곳의 경계도 사라졌다. 이제 열아홉 마리의 유기견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잡고 천장도 없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하늘에는 결국 별이 반짝였고, 하나의 눈망울마다 하나씩 별이 담겼다. 다리가 아파 멀찍이 앉아계신 묘법 연화사의 보살님의 눈에도 달이 담겼다. 그렇게 가장 낮은 곳도 아름다운 밤하늘이 펼쳐진다. 진짜 도움을 주는 쪽은 보호소 바깥의 사람들이 아니라, 보호소 가족들 인지도 모르겠다. 판자촌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에 괜히 소리를 한 번 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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