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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May 03. 2023

아침 여성 수영반

프롤로그

마흔일곱에 수영을 배웠다. 그때까지 운동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운동신경이 형편없고 체육 수업에 나오는 다양한(높이 뛰고 멀리 뛰고 달리고 던지고 매달리고 구르고 일으키고……) 종목을 예외 없이 못했다. 특히 달리기는 처참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위해 출발선에 서는- 심장이 날뛰고 눈앞이 아찔하던- 순간, 마침내 앞선 무리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마는 ‘낙오’의 기분이 어찌나 두렵고 민망하던지. 고등학교 시절, 체력장으로 ‘오래달리기’(체력장의 하이라이트라고나 할까)를 할 때는 친구들이 내 입에 소금물 적신 거즈를 물리고 양옆에서 이끌어 준 덕에 가까스로 완주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작은 키’를 유지했고, 엄마는 나를 보면 입버릇처럼 “몸이 약하다”고 말했다. 잔병치레가 잦다는 게 이유였는데, 또래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자주 아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 머리에 한번 입력된 정보는 굳건했고, 교회 권사님이던 할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그 탓인지 나는 매사에 소심하고 종종 위축되었으며, 작은 일에도 걱정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몸을 사리고는 했다.


성인이 된 후로는 체육 수업을 안 해도 돼서 좋았다. 건강을 위해 끈덕지고 보람차게 운동한 적도, 당연히 없다. 결혼 전, 내 활동 반경은 좁고 뻔했는데, 주로 내 방, 일터(작은 출판사), 때때로 음침한 재즈 카페, 눅눅한 지하 연습실(한때 나는 재즈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는 정도였다. 당시 교류하던 이들-아마추어 뮤지션, 편집자, 작가 지망생, 각종 프리랜서, 백수, 만화/영화 마니아 등-도 대개 비슷해서 ‘운동인’은 무척 희귀했(고, 술이나 담배에 전 인간들은 흔했)다. 느른하고 응달지고 폐쇄적인 내 하루의 사이클, 좁고 구석진 세계에, 힘차고 명랑하고 의지(意志)적인 ‘운동’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삼십대 중반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소극적인 동선으로 소박하게, 사소한 재미만을 추구하던 일상은 무참히 어그러졌다. 아이의 욕구와 리듬에 나를 애써 맞추고,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줄도 몰랐)던 역량을 어떻게든 끄집어내야만 가능한 하루하루였다. 엄마 역할에 총체적으로 무능하여 매일 울고 싶었는데, 아이를 낳기 전에는 좋은 엄마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게 한심했다. 우울과 무기력과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위내시경 검사를 위해 병원에 간 김에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는데, 뜻밖에 갑상선암 진단이 내려졌다. 첫아이가 두 살 되던 해의 일이다.


수술 뒤 방사능 치료 때문에 잠시 아이와 떨어져 있을 때, 책장에 꽂힌 <모모>(미하엘 엔데)를 다시 읽었다. 작고 조용한 여자아이가 전심으로 타인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침착하게 움직임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좋았다. ‘이야기를 쓰고 싶다, 어쩌면 쓸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난데없는 꿈에 빠져 이듬해 동화작가 수업에 등록했다. ‘최소 움직임 주의’를 지향하던 그동안의 패턴에 비하면 잽싸고 능동적인 행동이었는데, 육아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인 듯하다.


수술을 받은 뒤 2년쯤은 쉰 목소리가 났고 무언가 ‘센’ 자아로 변한 기분도 들었다. 시나브로 중년에 접어드는 중이었다. 글쓰기를 공부하면서 삶을 찬찬히 둘러볼 여유를 얻었다. 세월에 쫓기듯이 결혼과 육아를 시작했으나 내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는 ‘어른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어린 모모는 이미 스스로를 돌볼 줄 알았지만). 어른이 되기를 두려워하던, 성장을 유예하던 나는 다른 세계로 걸음을 내디뎌야만 했다. 관성에 따라 단조로이 움직이던 궤도에서 방향을 틀어 줄,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늘 관심 밖이던 내 몸에 슬슬 눈길을 주었다. 운동신경이 둔한, 단련한 적이 없는, 주로 사무 노동을 했던, 수술을 받고 회복한, 생명이 자라고 젖을 준, 나이가 들어가는, 자신감이 없는, 작은, 여성의 몸. 40여 년 동안 도무지 마음이 가지 않았던 행위,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일(‘운동’의 사전적 정의)을 비로소 시작했다.   


지인의 권유로 단전호흡, 헬스 등을 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유정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주인공이 수영 선수라서 수영을 배웠는데 재미있다고. 때마침 ㅅ 수영장 셔틀버스가 집 근처까지 온다는 소식도 들렸다. 내가 무슨 운동을 할지 고민하자 어쩜, 온 우주의 기운이 ‘수영’을 가리키고 있지 않은가. 나는 ‘마침’이라는 타이밍, 찌르르한 ‘동시성’에 이끌렸다.


수영을 배워 보면 어떨까?


운동을 싫어하는 나도 물놀이는 즐기니까 재미있게 배울 수 있을 거야. 만에 하나 수영을 잘하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근사할 것인가. 가령 아이들과 물놀이를 간다.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며 노는 가운데, 나는 물속에 사뿐히 뛰어들어 한 마리 아름다운 비단잉어처럼 유유히 노닌다. 아이들아, 우아하게 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엄마를 보렴.


몇 년 후 이와 비슷한 장면은 현실이 된다. 다만 아이들은 내 수영에 조금도 관심이 없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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