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루비 May 21. 2023

푸켓 바다에서 아버지를 그리다

이듬해 3월, 아버지는 식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고 책을 좋아했는데 말년에 알코올 의존증을 앓았다. 무심한 듯 보여도 내 선택을 조용히 지지해 주던 분이었다. 술에 빠지면서 아버지는 조용하지만은 않았고, 마지막 몇 년 동안 진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게 실감이 되지 못하여 몇 달간 어리벙벙했다. 어지러운 마음을 밑바닥에 눌러 둔 채 일상을 분주히 지냈고, 아침에는 어김없이 수영장에 갔다. 거친 숨을 뱉고 온몸을 버둥거리며 살아 있음을 생생히 느낄 때, 아버지는 고통과 진통, 옅어지는 현실과 깊은 잠, 꿈과 섬망 사이를 오갔다. 나 홀로 물속을 가르는 순간에는 종종 두려움이나 슬픔이 훅 올라와 호흡이 더 버거운 듯도 했다. 하지만 오로지 나아가고자 물에 맞서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그 단순하고도 격렬한 루틴이 없었다면 내게 그 시절은 더 힘겨웠을 것이다. 


4월 말, 푸켓행 밤비행기를 탔다. 오래 전 계획한 가족여행이었다. 수영을 배운 지 다섯 달쯤 되었을 무렵이다. 너른 야외 수영장과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마음껏 수영할 것이었다. 나는 꽤 들떴고 그럴수록 마음이 무거웠다. 아버지 병세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비행기는 간간이 난기류를 만났고 안전벨트 표시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 순간, 웬일인지 나는 극심한 공포증에 사로잡혔다. 내가 수천 미터 상공에 떠 있다는 게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비행기가 깜깜한 밤하늘을 무사히 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마음 한가운데 크고 단단한 공포가 똬리를 틀고 온몸을 장악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픈 아버지를 두고 휴양지로 떠난다는, 무언가 죄의식의 발로였을지도 모르겠다.  


푸켓 남쪽의 야누이 해변은 한갓지고 아름다웠다. 한 남자가 조깅을 하고, 개가 바닷물 사이로 뛰어다니고, 딸은 새를 잡으러 살금살금 걸었다. 모든 게 생동감을 얻고 반짝반짝 빛을 냈다. 나는 바다에 누워 팔을 저었으나 목적한 방향으로 가지 못했다. 들썩이는 파도가 나를 자꾸만 다른 곳에 데려다 놓았다(물론 내가 서툴렀던 탓이다). 바다에 몸을 맡기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는 건 시간의 일이며, 나는 지금을 마음에 남길 뿐이었다.      


아버지는 그해 6월에 돌아가셨다. 당신은 몇 권의 일기장을 남겼고, 나는 아버지를 새록새록 그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 여성 수영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