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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May 06. 2023

아침 여성 수영반

샛별 님

초급반을 시작하고 몇 달이 흐르자 뒤에서 2번째로 순번이 앞당겨졌다. 맨 뒤를 차지한 이가 샛별(가명) 님이다. 당시 우리 반 회원은 여섯 명으로 줄어 한둘만 빠져도 썰렁했는데, 하루는 나랑 샛별, 딱 둘만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처음으로 ‘1번’이 된 것이다. 모쌤은 그날, 샛별만 달랑 서 있는 휑한 레인을 수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다, 내가 뒤늦게 도착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샛별은 50대로 눈이 반짝거리고 자주 깜박깜박한다. 몸집이 낙낙하고 미소가 온화하다. 교사였고 은퇴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했다. 비록 개헤엄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물에 잘 떠서 갔다. 수영할 때 샛별은 신나 보였고, 순서를 무시하고 앞서가려는 바람에 모쌤한테 자주 제지당했다. 샛별과 있으면 덩달아 수영이 즐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샛별은 모쌤의 가르침과는 딴판으로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였다. 자유형(일반적인 자유형 자세와는 사뭇 다르지만)은 어찌어찌 속도를 내서 가는데, 배영은 함흥차사. 맞은편까지 갔다 돌아오는 중간지점에서 방향이 50도쯤 틀어지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표류하다 수영모는 벗겨져 둥둥 떠다니고는 했다. 샛별은 수영모가 자주 벗겨졌는데 뒷머리가 납작해서라고, 어렸을 때 순해서 잘 누워 있어 그런 거라고 했다. (모쌤은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고.) 샛별이 양팔로 찰방거리며 유유히 떠다니는 모습은 어쩐지 귀여웠다.

“아유, 새로운 영법이네!”

그 광경을 보며 모쌤이 말하면 우리 회원들은 큭큭 웃었다.

처음에는 샛별이 그저 행동이 굼뜨고 종종 건망증을 보이는 것이려니 여겼다. 어느 날, 그녀는 옷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고 탈의실을 헤매느라 수영을 못하였다. 옷은 (자신의 옷 칸이 아닌) 애먼 곳에서 발견되었다. 신발은 결국 못 찾아서 마침 바닥에 놓인 신발을 신고 가 버렸는데, 하필이면 해외 직구로 샀다는 모쌤의 슬리퍼였다. 영문을 몰랐던 모쌤은 낡은 슬리퍼 따위가 왜 사라졌는지 한참을 또 찾아 헤맸고. 하루는 내가 탈수기에서 꺼낸 수영복을, 샛별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겼는데 그녀의 수영복은 탈의실 탁자에 젖은 채로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이런 사정이다 보니, 샛별이 전후좌우 늘 분주히 주시하는 아주머니들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었다. 우리 옆 레인에서 자유 수영만 하는 70대 아주머니는 샛별을 종종 챙겼다.


“이런 비닐을 가져와서 수영복을 넣어요. 그럼 물이 안 흘러!”


아침 9시대 회원들의 주류는 6~70대 정도(주로 상급반)로 보이는데, 오래 다닌 이들은 언니-동생 사이로 끈끈하고 대화가 살갑다. 언젠가 한 아주머니는 좋은 일이 있다며 수영반 전체에 떡을 돌리기도 했다.


은유의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에는 ‘여성간의 자매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갖은 고초를 예민하게 겪은 뒤 차마 외면이 안 되는, “아픔을 향해 열린 36.5도 눈물 방”에 대해.


“고장 난 육신을 이끌고 빈자리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것도 아주머니들이지만, 의자에 앉아서도 신경줄 놓지 못하고 생면부지의 사람 쿡쿡 찔러서 건너편 빈자리가 났음을 알려주는 것도 아주머니들이다.”


친구는 수영을 배우던 시절, 젖은 몸에 수영복을 입느라 용쓰고 있으려니 한 아주머니 손이 엉덩이 쪽으로 불쑥 들어와 식겁했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느닷없고 거친 방식이지만 도움을 베풀려는 그 나름의 선의임을 이해한다. 우리 수영장에도 샤워실을 돌아다니며 꼬인 수영복 끈을 펴는 등 매무새를 바로잡아 주는 아주머니가 있다.


수영 전 샤워를 안 하고 들어간다며 ‘꼰지르는’ 것도, 샤워기가 비면 어서 쓰라고 알려주는 것도, 목욕 바구니로 샤워기를 찜해 놓거나 소소한 걸로 아옹다옹하는 것도, 뭔가 부족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이를 지나치지 못하는 것도 아주머니들이다. 이런 아주머니들의 도움에 힘입어 샛별은 한동안 별일 없이 수영을 배웠다. 하지만 점점 증세가 나빠지면서 몇 달 뒤, 더 이상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수영할 때면 기쁨으로 발그레해지던 얼굴, 친근한 말과 환한 미소, 반짝이는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물을 헤치며 마음껏 즐겁던 수영의 순간이 샛별에게 오래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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