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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May 25. 2023

그루비한 접영

피아니스트 레드 갈란드의 유명한 재즈 트리오 앨범 제목은 ‘그루비’(groovy)다. 이 음반의 해설을 쓴 평론가 아이라 기틀러는 “기본적으로 이 단어(groovy)는 훌륭한 연주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특히 소울적인 열기(soul-warming)와 달콤함(mellow) 그리고 편안하게 풀어진(relaxed) 느낌을 함축”한다고 설명한다.(황덕호, 『그 남자의 재즈 일기』) 


설명을 읽은들 ‘그루비’를 이해하기는 어렵고, 음악을 듣고 느끼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루비’라는 단어를 ‘(특히 흑인음악처럼) 낭창낭창하고 끈적끈적한 리듬을 몸이 절로 타면서 꿀렁거리는’ 정도로 이해한다. 리듬을 ‘타는’ 것은 긴줄넘기 놀이(‘꼬마야 꼬마야’)와 비슷하다. 줄이 그리는 원 속으로 들어가 줄과 하나가 되어 도는 것. 내 몸이 어느 우주와 조응하여 절로 몸이 들썩거리는 일이다. 


느닷없이 리듬에 대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모든 운동이 그렇겠지만) 수영 역시 리듬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영법에서 리듬은 중요한데, 접영은 그 움직임이나 완급이 가장 다이내믹해 보인다. 물속으로 쑥 들어갔다 양팔을 벌리며 솟구치듯 나오는 모습은 멋지다. 내 느낌으로 가장 ‘그루비’하다. 물에 들어갈 때는 ‘편안하게 풀어’지고, 솟아오르는 순간에는 ‘소울적인 열기’도 느껴진다. 무엇보다 ‘꿀렁꿀렁’의 연속이다. 이른바 ‘웨이브’라고 하는 몸의 요동이 강조되는데, 몸이 물을 타고 물결을 그리듯이 움직여야 한다. 너무나도 알 것 같은 이야기다. 나는 리듬감이 나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웨이브를 사랑했다.(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곡 ‘웨이브’도 매우 좋다.) 


모쌤이 접영의 ‘웨이브’를 우아하게 선보였을 때, ‘어쩌면 저 동작이야말로 내가 할 만한 게 아닐까’ 잠시 상상하기도 했다. 물론 뚱딴지같은 기대였다. 내 마음과는 달리 내 몸은 접영의 원리를 완벽하게, 1도 이해하지 못했다. 배운 지 한참이 지나도록 내 접영은 도무지 접영처럼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거의 나아가지 않았고 숨은 두세 배쯤 더 차고 웬일인지 발이 바닥에 닿고는 했다. 날이 가도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점점 더 망해 가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접영은 역시 이번 생에서는 무리인가. 그래도 자유형이랑 배영은 얼추 비슷하잖아.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해.’ 


당시의 나에게 접영이란, 피아노 초심자에게 초절정기교만큼이나 불가능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아예 가망이 안 보였으므로 접영을 향한 야망도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접영을 못한다는 게 하나도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는데,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자신의 역량으로는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겠다 싶은, 자기 설명이 도달하지 못할 머나먼 외계 생명체를 보는 듯한, 모쌤의 암담한 표정이랄까. 


예전에 모 기관에서 성인 피아노반 레슨을 잠시 한 적이 있다. 바이엘 상권을 배우던 한 여성은 박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2분음표(2박)가 두 개 그려져 있다고 치자. 나는 옆에서 볼펜으로 피아노 모서리를 톡, 톡 두드리며 “도 둘, 레 둘……” 하고 박자를 센다. 그녀는 ‘도’를 친 뒤, 자꾸만 2와 1/3박이나 2와1/4박 지점에서 ‘레’를 눌렀다. 아무리 박자를 두드리고 입으로 읊어도 그녀의 도와 레는 같은 길이의 두 박으로 나누어지지 못했다. 내가 경험한 최고의 박치라고 할 수 있다. 균등하게 반복되는 박자라는 감각이 아예 그녀의 몸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무슨 수로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 난감했다. 모쌤의 눈빛은 어쩌면 그녀를 바라볼 때의 내 눈빛과 닮았을지도…….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접영(을 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의외로 성실하기 때문이다. (별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선과 영은 나보다는 사정이 조금 나았지만 봐줄 만한 정도는 아니었고, 접영 이야기만 나오면 우리는 웃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아아, 힘들고 우스꽝스러운, 정말이지 그루비한 접영의 날들이었다. 


그러므로 가슴속에 불가능한 접영의 꿈을 안고, 오늘도 웨이브, 웨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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