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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Jun 16. 2023

‘나머지 레인’의 시간

초급반에 들어간 지 1년 2개월여 만에 우리 반은 해체되었다. 그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에 사이드 턴과 플립 턴, 여러 ‘스타트’ 자세를 배우고, 자유형 ‘뺑뺑이’에 익숙해졌다. (물론 나는 많은 동작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상급반에 오를 것을 대비해 며칠간 오리발(수영 ‘핀’)을 신어 보기도 했다. 모쌤은 내게 할 만큼 했고, 나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았다. 


선, 영과도 아쉽지만 헤어져야 했다. 선은 상급반(깊은 풀)으로 올라갔고, 영은 새 직장에 다니느라 아침 9시 수영이 어려워졌다. 점프 스타트를 하고 오리발로 슉, 슉 나가는 모습은 근사했지만, 상급반은 –당시 25미터만 가도 숨이 차올라 까무러칠 듯하던- 내가 있을 곳이 못 되었다. 나는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쓸쓸히 ‘나머지 레인’(?)에 남겨졌다. 내가 배우는 시간에는 얕은 풀 4개 레인 중 한 곳(1번 레인)에서만 강습이 진행되며, 나머지 세 레인(2, 3, 4번)에서는 7~80대 회원들이 슬슬, 설렁설렁 자유 수영을 한다. 


나는 2번 레인에서 수영을 시작했고, 1번 레인에는 새로운 초급반이 들어왔다. 그들의 열정적인 “움퐈”와 발차기를, 나는 아련한 눈빛으로 힐끗거리고는 했다. 하얀 물보라를 날리며 와글와글 생기가 넘치는 옆 레인과는 달리, 우리 레인은 뭐랄까……, 고즈넉했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 두세 분이 함께하다 차츰 ‘홍시’ 님(아마도 70대, 홍시 빛깔 수영모를 씀)과 나만 하는 날이 늘어났다. 홍시 님은 얼굴이 해사하고 차분했다.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친다거나 소리 높여 웃는 일이 없었다. 오늘도 내일도 진득하고 묵묵하게 수영을 했다. 


그에 반해 옆 3번 레인 아주머니들은 수다 반, 수영 반을 하는 모양새였다. 그녀들은 수영하다 짬짬이 걷고 스트레칭을 하고 수다를 떠는 분주한 와중에도 내 수영을 유심히 살피고는 한두 마디씩 말을 보태었다.     


“천~천히. 급하게 하지 말고. (자유형)”

“팔을 뒤로 이렇게 쭉! 밀어야지. (접영)”

“아아, 네……. (흐억, 헉…….)”     


몸이 안 따를 뿐 몰라서 못했을 리 없건만, 나는 예전에 미처 몰랐던 귀한 깨달음인 양 눈을 반짝였다. 한 아주머니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할 줄 아는 영법만”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음…….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렇게나 이상해 보이는구나.’     


나 또한 아주머니들의 수영을 유심히 보고는 했다. 그녀들의 수영은 빠르지도, 힘차거나 멋스럽지도 않지만 마냥 여유작작하다. 바로 내가 바라는 모습이었다. 아아, 역시 힘을 덜 뺀 게 문제였나, 힘 빼기의 경지가 다른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말했듯이 힘 빼기는 ‘기술’이고 그것도 “미묘한 고급 기술”(김하나,『힘 빼기의 기술』)이니. 미묘한 고급 기술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을 터이다. 아무리 힘을 뺀 듯해도 아직도 뺀 게 아니고, 아니란 걸 깨달은들 뺄 재간이 없다가, 무수히 되풀이하는 와중에 시나브로 몸에 익는 것.


홍시 님은 오로지 자유형과 배영만을, 느릿느릿 쉼 없이 연습했다. 나는 어푸어푸 푸닥푸닥 25미터를 찍고 헐떡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쉬었다 가고, 홍시 님은 실바람에 떠가는 꽃잎마냥 느긋이 열이고 열두 바퀴를 오갔는데, 우리는 서로의 진로를 방해하지 않고 얼추 합이 잘 맞았다. 홍시 님이 한결같은 아다지시모라면 나는 박자 무시+잦은 삑사리→ 아첼레란도+뜬금 스포르짠도……랄까. 


나는 '나머지 레인' 아주머니들의 힘 빼기를 흉내 내며 수영이 조금은 편해진 듯했는데, 그러는 동안 1번 레인의 초급반은 어느 새 평영에 이어 한 팔 접영까지 쑥쑥 진도가 나갔다. 아무리 봐도 내 실력이 그들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도로 초급반(1번 레인)에 합류하게 된다. (때마침 젊은 남선생님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결심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리하여 나는 여전히, 수영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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