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녀는 내 심장뛰는 소리를 먹고 살았어"

습작

by 차가운와인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화장하고 옷을 입는 타입의 그런 여자는 싫어"

라고 그는 눈을 찡그린 채 말했다


우리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에 앉아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마시기엔 아직 해가 너무 높이 떠있었지만 맥주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지루한 날이었다. 물푸레나무로 만들어진 나무 계단은 주차장에서 부터 해변으로 길게 이어져 있어 물놀이 준비를 하지 않은 여행자라 해도 맨발로 해변 가까이까지 걸어오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계단은 나무 가지처럼 오른쪽 왼쪽으로 뻗어 있었고 그 가지의 끝에는 넓은 평상처럼 공간을 만들어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큰 비치파라솔과 덱체어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늘에서 보면 오른쪽 왼쪽으로 질서있게 가지 뻗은, 잎이 떨어진 하얀 나무처럼 보이겠군 하고 생각하며 걸어왔다.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 계단은 왠지 핀란드를 연상시킨다.


"이봐, 여자는 뭘 먹고 산다고 생각해?

정확히 말해서 예쁜 여자는 말이야,

자신을 쳐다보는 다른 남자들의 심장 뛰는 소리를 먹고살지"


그리고 나서 그는 별로 재미없다는 듯이 나무 바닥의 페인트를 손톱으로 몇 번 긁고는 맥주병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예쁘지 않은 여자들은 뭘 먹고 살아?"


"그런 여자애들은, 대개 다이어트를 하지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이 잘들 먹어대면서도 다 먹고 난 뒤엔 꼭 '다이어트 해야 하는데' 라는 말을 덧붙이지만"


"넌 예쁜 여자가 좋은 거야?"

라고 난 조금은 난처한 듯 물었다.

그는 외모 따위로 여자를 양분하거나 하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예쁜 여자가 좋다고 말하는 게 아냐. 오히려 난, 여자처럼 느껴지는 여자가 좋단 말이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난 여자같이 느껴지는 여자, 가 좋아. 전근대적인 발언이니 어쩌니 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따지고 들기 좋은 말이겠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아이라인이 고르게 잘 그려졌다든가 아이쉐도우의 그라데이션이 자연스럽다든가, 은은한 펄이 들어간 메이컵 베이스덕에 피부가 투명해 보인다든가 하는 그런 것도 물론 보기 좋아. 하지만 난 화장안한 얼굴로 나타나도 스스로 전혀 어색해 하지 않고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타입의 여자가 좋거든. 스스로 민망해 하거나 어딘가 불편해하거나 하지 않는 그런 스스럼 없는 아름다움이 좋단 얘기야"


"내가 보기엔 화장안해도 예쁜 여자가 좋단 소리로 들려"

라고 말하자 그는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아냐 됐어. 잠시 그녀가 생각났을 뿐이야. 그만 가지"


우리는 해가 조금씩 기우는 늦여름의 해변을 뒤로 하고 핀란드를 연상시키는 흰색 나무계단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간간히 돌풍처럼 강한 바람이 불어와 저 멀리 수영금지라고 적혀있는 깃발을 펄럭이곤 다시 잠잠해졌다.


"이번엔 내가 운전하겠어. 오랜만에 운전을 하고 싶군"

하고 그는 내게서 키를 받아 갔다.


"그녀는 내 뛰는 심장소리를 먹고 살았어. 자신 앞에 서면 내 심장이 두 배는 빨리 뛴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지. 그녀는 어떤 남자든 심장이 두 배는 빨리 뛰게 만들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거 같았어.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지. 가질 수 없는 여자가 내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드는 건 불공평한거야. 그녀는 살찌고 난 더 빨리 늙어가는 듯 한 느낌이 들거든"


라고 말하고 그는 키를 돌려 시동을 걸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골프